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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느 맑은 겨울날

작성자
환상향의은결정연랑
캐릭터
파이
등급
결전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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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me 2021.12.17
  • view2813

-본 작품은 위상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며, 원작보다 시간이 더 지나간 시간대입니다. 원작과는 다소 큰 설정 차이가 존재하는 2차 창작입니다.
-본 작품은 픽션으로, 실제 게임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AKF Striker 선수가 이번에도 정글을 골랐군요.”
"이번 플레이에서 또다시 하이라이트를 뽑아낼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다른 선수들도 작전이 다 준비된 건지 챔피언을 빨리 고르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한 현장.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내 게임플레이. 관중들과 앵커의 목소리가 난무하는 이곳이지만, 내 귀에는 게임 속 전장으로 나가기 직전의 고요함과 팀원들의 목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세ㅎ…. 아니, Striker. 예상대로 상대팀이 너의 움직임을 봉쇄했는데 괜찮은거지?"
"문제없어. 신경쓰지말고 네가 잘하는 걸 골라."
Wolf가 원거리 딜러를 골랐다.
"아~저 챔피언은 상당히 어려운 챔피언이거든요? 그런데도 과감하게 선택하는 Wolf 선수입니다!"
"역시 AKF의 선수는 다르다는 걸까요?"
컨디션 조절은 하루면 충분하다. 손에 충분히 휴식도 취했고, 어깨도 아프지 않다. 팀원들의 컨디션 역시 OK. 절대로 지지 않는다.
"모든 선수가 챔피언을 골랐습니다. 잠시 후 경기, 시작합니다!"

"경기 수고했어. 이세하."
"형도 수고했어요."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복도에서 페트병에 든 음료를 벌컥벌컥 마신다.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손과 발에 땀이 한가득이다. 갈증도 심하게 난다.
"이야, 역시 세하의 갱킹은 매섭다니까. 분명 이번 방송도 하이라이트 절반 이상이 네 플레이로 찍혔을 거야."
"과분한 말씀이에요. 석봉아. 너도 수고했어."
석봉이는 이번 게임에서 탑 라인을 골랐다. 초반에는 밀렸지만 한타(한방 타이밍)에서 승리한 이후 착실하게 스노우볼링(약간의 차이가 시간이 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남)을 해내, 결국 왕귀(왕의 귀환, 대기만성)에 성공해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오늘의 승리의 주역! 수고 많았어. 내일 회식 한번 하자. 어디서 할거야?"
"AKF Lord 한석봉의 선택은 뭐려나?"
"이 근방 고기 무한리필집이 좋죠. 레스토랑도 좋지만 한번은 위장 가득 채워보고 싶거든요."
"좋아 좋아. 다음."
가방 속에 있는 내 자판과 마우스를 잠시 보았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자판은 쉴 새없이 두들겨서 키 패드 일부가 닳아 있었다. 하지만 형들은 그거마저 영광의 상처 이자 고행의 흔적이라며 치켜세워주었다.
"전 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나요.”
"그래 그래. 수고했어. 며칠 뒤 광고 또 찍지? 광고 잘 나오게 한다고 무리해서 운동하지 말고."
형이 가져온 허브티는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찬바람 때문에 좀 식었지만 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전에 보온병이 망가진 이후로 새로 장만하지 않았군. 새것으로 해도 될 정도로 자금사정이 있으면서.
"윽."
숙소에 돌아가서 인공눈물이나 떨어트리고 눈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꺼둔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수십 개의 메시지와 수 통의 메일이 날아와 있었다. 대부분은 광고성 메일이라 가볍게 삭제해버리고, 과하게 이모티콘이 들어간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
"엄마도 참."
대회 나간다고 휴대폰을 꺼 뒀더니, 메신저로 응원이 와 있었던 것이다. 닭살 돋는 모자의 메신저는 일단 숨겨두기로 했다. 이건 같은 팀원들에게도 숨기고 있는 비밀 같은 거니까.

"네, 현재 경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라 거리의 눈을 다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데요! AKF Striker 이세하 선수가 한타에 들어갑니다!"
E스포츠 스타디움의 자리란 자리는 모두 꽉 차 있었고, 우리가 경기에 임하는 모습이 올라왔다.
"더블 킬, 트리플 킬까지 따냅니다! Striker 선수, 역시 강하네요."
우리 팀이 점수를 올릴수록, 관중들의 열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특히 나는 더 큰 환호성을 받았다.
"예상대로 하이라이트는 죄다 이세하가 쓸어가는구나."
"그만해요 형. 부끄러워요."
"짜샤.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고. 뭐가 부끄러워?"
숙소에서 경기 영상을 보면서 웃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확인해보니 엄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잠시 양해를 구한 뒤, 현관 로비 밖 계단으로 올라가 전화를 받았다.
(아들! 경기는 어떻게 됬어? 이겼어?)
"네. 무사히 끝났고 이겼어요."
(어머나. 축하해 아들!)
"영화는 어떻게 되가요?"
(지금 휴식중이야. 5분 뒤에 촬영 들어가.)
"무리하시는 거 아니죠? 저번에 제가 보낸 선물은 받았고요?"
(잘 받았지! 잘 쓰고 있단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촬영 잘 끝내세요. 사랑해요. 엄마."
(응, 그래. 이따 촬영 끝나고 다시 통화할게! 사랑해 아들!)
어릴 때 나는 사고를 당할 뻔했다. 흔히 당하는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인재(人災)에 휘말렸다. 잘못 설치된 가스관 몇 개가 가스를 뿜었고, 커버가 벗겨진 전기선에서 발생한 스파크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다.
"세하? 세하야!"
"아빠아!"
소방차가 진입했으나 도로는 지나치게 비좁았다. 시간이 계속 흐르는 사이, 건물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빠는 시민들을 계속해서 피신시켰다. 그 과정에서 유독 가스를 마시기도 했고, 뜨거운 난간을 잡기도 했다. 나는 다행히 출구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아빠가 먼저 구해 줬다. 그럼에도 아빠는 계속 구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며, 시민을 구하는 것은 소방관인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라며, 어떤 방열 장비도 없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흐어억…!"
아빠는 몸 곳곳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다행히 아빠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구하고 나서야 건물이 무너져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아무래도, 이제 소방관으로서는 무리이실 것 같습니다."
그 위험천만한 현장에서, 맨몸으로 시민들을 구한 댓가로, 아빠는 두 번 다시 소방관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치료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계속,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했지만 다행히 최근 건강을 회복하셨다. 다행히 엄마는 물론 그 어떤 곳에서도 아빠를 안좋게 ** 않았다. 아빠가 일하던 소방서에서도 메달을 주셨고, 치료비도 대부분을 대주셨다. 그래도 나는 나를 구하다가 일을 그만두신 아빠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기에, 부모님은 그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사랑에, 부모님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성적도 할 수 있는 만큼 올리고, 좋아하는 취미를 직업으로 바꿔서,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전화 끝났어? 감독님이 회식 메뉴 고르래. 오늘 저녁에 나간다고."
"네, 들어갈게요. 형."

"다들 경기 수고했어! 건배!"
-쨍!
"AFK의 승리를 축하하며!"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른 상태였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아예 쉬는 거라며 다들 안심하고 술병을 깠다. 
"너무 마시지 마라. 숙소에서 토하면 안 봐준다!"
"저희가 조절 할게요. 걱정 마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적당히 차가워서 마시기 딱 좋은 상태의 맥주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야야. 건배사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되겠어?"
"준비는 못했다고요."
아직도 건배사는 창피해서 적당히 짧고 간결하게 끝냈다. 엄마처럼 아직 길고 멋들어지게는 무리란 말이지.
"석봉아. 벌써 젓가락 내려놓는거야? 불판 이제야 2번째라고?"
"괜찮아요. 저 입 짧은 거 알잖아요."
"그러니 그리 말랐지. 야. 조금 팍팍 먹어도 돼. 슬비에게서 변했다는 모습 들어보고 싶지 않아?"
"으아악! 슬비 이야기는 반칙이에요!"
석봉이는 슬비 이야기만 나오면 제대로 대체하지 못한다. 특히 이런 술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거의 100일이 되어가는데도 참. 아직도 제대로 리드 못하고. 이봐. 사랑은 말야. 절대로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형! 제발 그만해요. 창피해."
미안. 석봉아. 계속 널 응원하고 있지만, 진도가 조금 느린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세하 넌? 유리랑 잘 되어가?"
"걔 장교 합격하고 나서 바빠요. 오후 늦게 연락하는 편이고. 당직인 날은 전화하다가 기프트콘 보내는 편이에요."
"기프트콘?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걔는 그거 좋아하는데요."
본인이 못 먹으면 동생들에게 보내면 되니 좋다나.
"언제 한번 날 잡아서 데이트 한번 하고, 러브 호텔도 한번 데려가 봐."
"현역인 애를 어떻게 데리고 갑니까! 군법으로 심판 받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짜샤. 준비 철저히 하면 안될 게 어딨어."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어차피 다음주에 만나요.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거든요."
형은 눈을 돌리면서 싱긋 웃었다.
"그래? 그때 고백 팍 해버리라고. 짜샤. 석봉이 너도 마찬가지야!"
"형. 술이나 더 해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져서 술잔을 다시 채워드렸다. 형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숙소 어딘가에 내가 보관해둔 새 반지가 있다. 커플링 이상의 반지다. 각오는 이미 다졌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있다.

"제발…. 제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어제 열심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또 1년을 재수하는 끔찍한 생활은 바라지 않는단 말이야!
"한번만으로도 족해!"
-딸깍.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슬비야! 결과 나왔어?"
"으냐악! 몰라요!"
몸이 덜덜 떨리고, 눈은 떠지지 않았다. 화면을 도저히 정면으로 볼 수가 없었다.
-덜컥!
"슬비야? 슬…."
이모가 들어와서 모니터를 보는 소리가 났다.
"세상에…. 세상에…!"
"이, 이모, 설마?"
"합격 이야! 축하해!"
"꺄아아아악!"
세상에! 합격이다!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하는데 성공했어!
"슬비야! 축하해! 지금까지 정말로 고생 많았어!"
"수, 숨막혀요 이모!"
잠깐의 괴로움이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전액 장학금 입학은 내가 정말로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슬비야! 뭐 먹고 싶어? 오늘은 기분 좋게 외식하자꾸나!"
"뭐든지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메시지를 날렸다. 친구들로부터 축하 메시지가 속속 날아들었다.
-합격 축하해. 슬비야. 좋은 캠퍼스 생활 보내길 바래.
"이세하…."
요 녀석은 예전부터 답장을 시큰둥하게 보낸단 말이야. 김빠지게. 석봉이는 온갖 미사여구를 너무 붙여서 좀 힘든데. 그래도 그게 석봉이니까.
"대답이 그거밖에 없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하늘만큼 땅만큼 천지가 새로 창조될 만큼 축하해!
"진심 이야? 고마워."
뭐, 그래도 소꿉친구니까 마음만큼은 정말로 기쁠 것이다. 내가 얼마나 걔를 잘 아는데.
"헤헤…."
상상 속의 캠퍼스 생활이 눈앞에 펼쳐졌다. 프린트물과 학과 교재, 그리고 태블릿으로 띄운 과제로 발표하는 나의 모습과,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 활동을 즐기는 모습. 학식당에서 같이 밥 먹는 모습…. 행복해!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어머니도."
"예…!"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사진 몇 장만 남기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부모님과 있었던 추억들은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천국에서 응원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어머니. 잊지 않을게요."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마한 액자를 보며, 나갈 준비를 했다. 잠깐이지만, 내 눈앞이 흐려졌다. 자자. 기쁜 날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지.

"그래서, 이 바쁜 저녁에 날 여기 부른 이유가 그거 때문이야?"
"응. 역시 바쁘네. 대학생이라는 거."
학교 카페는 카공족들이 많아서 대학교 외부의 카페에서 은하를 불렀다. 은하 역시 대학생으로, 현재 의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는 지라 그녀는 늘 바빴지만, 얼마 안되는 쉬는 시간을 쪼개서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이다.
"와줘서 고마워. 은하야. 커피는 내가 살게."
"아냐. 됬어. 커피 못 마셔. 마시면 내일 일 못해."
"커피만 아니면 되는거잖아?"
하는 수 없이 은하는 당을 채운다고 초코크림칩 아이스블렌디드를 시켰다. 나는 바닐라 아이스블렌디드. 그나저나 은하는 아이스블렌디드가 심하게 단 것임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옵션을 이것저것 붙이고 있었다. 정말 확실하게 혈당을 채워줄 수는 있겠지만 저녁을 건너뛰는게 좋을 것 같다 싶을 정도였다.
-쭈욱.
"그, 그걸 마실 수 있는거야?"
"응. 요즘 당이 많이 부족해서."
마시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당이 필요하긴 했나보다. 살짝 은하의 아이스블렌디드를 맛봤는데, 한 모금만 마시고 바로 뱉을 뻔했다. 개미가 이를 완전히 다 갉아먹어버릴 정도로 단 맛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너나 나나 참 고생이지. 매일매일 보고서 쓰는거도 힘들잖아?"
"덕분에 렌즈 끼고 지내. 책 계속 보다보면 피곤하거든."
은하는 예전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아빠인 은혜성 씨는 소방관이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관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던 상태였는데, 용기 있게 뛰어든 은혜성 씨는 뜨거운 난간을 붙잡고 들어가서 은하를 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잔해 더미를 온 몸으로 맞고, 유독 가스를 몇 번이고 마신 탓에 전신이 다 망가져버렸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다 구조하고 나서야 잔해 더미 속에서 구조된 은혜성 씨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가셨지만 두 번 다시 은하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소방서에서는 은혜성 씨를 영웅이라고 했지만, 정작 은하는 자기가 아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스스로를 자책했다고 한다. 심리 치료까지 집중적으로 받던 은하는 각오를 다지고, 열심히 책을 펼쳐서, 의대에 목숨을 걸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일류 대학의 의과 대학에 들어갔다.
"솔직히 기뻐. 드디어 첫 약속을 지켰거든."
은하는 의대에 들어간 날, 전신에 힘이 쭉 빠진 채로, 거의 하루 종일 잠들었다. 애써 감정을 누르고 있었지만 기쁨을 미처 다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나에게 전화한 은하는 눈물을 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약속 지키는 거 무리더라."
은하는 금세 아이스블렌디드를 거의 다 비웠다. 그래도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내가 아이스블렌디드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어? 부 학생회장님?"
"아아. 은하 양과 이슬비 양이군요. 반갑습니다."
화학공학과 3학년 부 학생회장 바이올렛 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폭력에서 날 구해준 적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 은인같은 분이다. 은하는 부 학생회장님이 마련해준 투룸에서 하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선배님은 여기 무슨 일이시죠?"
"조별과제를 위해서죠. 15분 뒤 여기서 모이기로 했답니다. 여보세요. 하이드? 네네. 조별 과제가 다 끝나면 다시 연락드릴테니 그때 다시 여기로 오도록 하세요."
비서 하이드 씨의 차량이 카페 주차장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쓸데없이 눈에 잘 띄는 차량이다.
"전공 관련인가요?
"아뇨. 이 조별 과제는 교양과목이랍니다. 전공 과목보다는 우선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중요하니 게을리 할 수는 없지요."
"역시 바이올렛 선배님. 쩔어."
은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알바시간 다 됬네. 슬비야. 이만 가볼게."
"어, 응. 조심해서 가. 알바 잘해."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회 안 잊었지?"
"안 잊었어!"
은하는 옅게 웃고 카페를 나갔다.
"슬비 양. 학업 힘들죠?"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괜찮아요. 선배님. 아직 시간이 있으시면 과제 관련으로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바이올렛 선배는 친절하게 내 과제를 잠시 도와주기로 했다.
"지금 이 문제 말이죠. 유효숫자 문제인데, 아직 조금 헷갈려서."
"간단해요. 소수점만 잘 보면 크게 문제될 거 없어요."
바이올렛 선배에게 과제 질문을 하고 있는 그 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선배.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네.”
서둘러 카페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석봉이었다.
(스, 슬비야. 나야. 석봉이.)
"석봉아,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봤어. 다음 주에 있는 동창회 때 꼭 와줄거지?"
"응, 당연히 가야지."
(정말? 그 때 꼭 갈게. 절대로 빠지지 않을게!)
"응. 나도 꼭 갈 테니까 빠지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 응! 알겠어!)
통화를 끊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안 남았구나. 동창회.
"석봉아…."
휴대폰에 하트까지 넣었다. 처음에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해서 거절할 뻔했지만, 그 두 눈이 진심으로 보였기에 나 역시 이젠 100일을 보고 있다. 그나저나…. 세하도 유리랑 잘 되고 있으려나?

"자, 이제 시작해볼까?”
머리를 잘라낸 생선 가시를 제거한다. 가시를 다 제거하면, 프라이팬의 열기를 확인하며 생선을 올린다.
-치지직.
으음. 아주 듣기 좋은 소리야. 다음은 끓고 있는 국을 살핀다. 간은 이미 딱 맞고 구수한 향이 확 올라온다.
이제.
완성된 식사를 접시에 담아서 내어간다.
"감사합니다."
손님의 대답에는 미소로 답해준다.
"후아아."
이름 없는 골목에 밥집을 연지도 어느새 긴 시간이 흘렀다. 한때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학원을 그만두고 밥집을 차리고 있다고 그때 상상이라도 했을까?
-위이잉.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여보? 오늘도 야근이라 조금 늦을 거 같아요.)
"휴우. 당신이 야근이 아닌 날이 어디있겠어? 난 당신이 걱정돼. 그러다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겠단 말이야."
(미안해요. 당신과 함께 보낼 시간이 없어서.)
"괜찮아. 힘들면 이야기해. 도울 수 있는 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밖에 없는 거 알지?"
(예. 물론이죠. 회의 시간이 다 됬으니 이만 끊을게요.)
결혼하기도 전에 잦은 야근 때문에 아내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기 위해 학원 강사를 그만뒀건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장님. 또 무슨 일인가요?"
"누구겠습니까?"
"아…. 혹시 사모님과 전화하신거에요?"
옆에서 알바를 하던 소녀가 말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역시 사장님은 애처가라시니까."
"결혼생활이란 게 그리 쉽진 않더구나."
소녀가 챙겨온 빈 그릇들을 모두 싱크대에 담았다. 모두 깨끗이 설거지를 해야 다음 주문이 밀리지 않는다.
‘다음은….’
치킨 마요네즈 덮밥과 돈가스 정식. 무난한 점심용 요리다.
“맞다. 사장님.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유리에게서?”
“네. 며칠 뒤 휴가가 나오는데 그 때 여기로 온대요.”
“좋겠네. 여기 한 번 들리라고 해.”
“예!”
서유리 요 녀석. 처음에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놀랐지. 그 어리고 미숙한 아이가 정말로 장교 시험에 덜컥 합격했을 줄 그때 누가 알았겠어.
“지금 뭐하고 있을까나.”

“충성!”
“으응!”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베레모를 단정하게 착용했다. 군복 역시 신분에 알맞게 각을 딱 잡아서 착용한 상태다.
“추, 충성.”
“응응.”
어딜 가도 경례를 받는 건 좀 피곤하다.
“요번에 오신 소대장님 대박 아니야?”
“엄청나지. 서유리 소위 님.”
“그치 그치.”
흠? 어디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거 같은데.
“엄청난 일이지. 성격도 좋으시지. 체력도 이상할 정도로 좋은데다가 그 정도로 예쁜 군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한 분 계시긴 하지. 윤현경 중사님.”
“윽. 윤 중사님은 악마라고. 서유리 소위님은 여신님이라구? 이상할 정도로 딱 군복을 맞추 셔서. 알잖아? 그 엄청난 크기의.”
“인정.”
오호라. 남자들의 이야기인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컥! 추, 충성!”
서너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경례를 했다. 모두 아주 제대로 경례를 하는 군. 상병과 병장들도 모두 제대로 경례를 하던데, 일병은 한 술 더 떠서, 훈련소를 어제 나온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좀 껴 줘봐.”
“아, 아닙니다!”
“내 이야기 중이었어?”
얼씨구. 움찔하는게 다 보이는 구만?
“그래도 이야기가 과하면 성희롱인 거 알지? 알아서 잘 조절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수고해.”
“충성!”
가던 길을 가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슬금슬금 자리를 떠서 이야기중인 병사들이 보였다.
“서 소위. 잠시만.”
“예!”
나보다 선임 간부인 윤현경 중사가 나를 불러서, 잠시 행정반으로 들어갔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는가?”
“예. 윤 중사님.”
윤 중사는 잠시 물을 마시고 이야기했다.
“서 소위는 부대원 관리가 아주 탁월하다고 들었는데, 진짜인 것 같다.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
“하하. 감사합니다. 방법이라면 딱히 없는데…. 일단은 제가 맡은 소대원부터 한 명씩 대해보고, 친근한 방식으로 접근해서 간부와 병사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것을….”

“그렇군.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부대 내의 작전 수행 능력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그래도 소대는 소대장 혼자서 이끄는 게 아니라, 소대를 이루고 있는 소대원 전부가 다 같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사 입장에서 한번은 생각해볼 이유가 있지요.”
“참된 마음이군. 알겠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이야기를 끝낸 윤 중사는 자리를 떴다.

“으, 허리야.”
요즘 들어서는 자주 당직을 서서 그런지 피곤하다. 그것도 사실. 오늘은 윤 중사님 대신 서는 당직이다. 원래 같으면 지금 퇴근했어야 맞는데, 자주 보고받고, 보고를 올리고, 순찰 도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다.
“당직 서느라 피곤할 텐데. 마셔.”
-휙.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문서를 정리중인 당직부사관에게 사제 커피를 주었다. 단숨에 캔 커피를 마신 당직부사관은 자판을 빠른 속도로 두들기더니, 어느새 마지막 문서도 처리했다.
“차량 보고만 받으면 되는거지?”
“예.”
한껏 기지개를 펴던 당직부사관이 내게 물었다.
“소대장님. 휴가 언제 이십니까?”
“나? 며칠만 있으면 휴가인데.”
“와. 당직 땜 빵 아니십니까? 힘들지 않으십니까?”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당직 부사관. 그러니까 파이팅 이야.”
이 때, 후번 근무자들이 들어왔다.
“소대장님. 근무 투입하겠습니다.”
“어, 음. 잠시만.”
간단히 준비하고, 근무자들을 투입시켰다.
“실탄 14발, 공포탄 1발 우상탄 이상 무.”
“투입-.”
행정반으로 복귀하기 직전, 행정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상근무병과 소대 전령의 대화인 듯 했다.
“솔직히 말해 윤현경 중사님은 너무 FM이지.”
“인정. 당직일 때 무사히 넘어간다면 정말로 복 받은 거야. 그분. 뼛속까지 군인이라고. 아니, 아마 태어났을 때 응애가 아니라 충성을 했을걸.”
“근데 그거 알아? 윤현경 중사님 본명 따로 있는거.”
“알지. 티나 스타이거 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부터 상당히 높은 군인이니 철저히 교육했을 수 밖에.”
“누구길래?”
“타 사단의 연대장님 이시지.”
“하아.”
연대장님 이라. 하하.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지내는구나.
“됐다…. 이런 이야기 해서 뭐하냐? 적당히 융통성 있게 하자고.”
“알았어. 근무 끝나고 보자.”
병사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적당히 시간을 재서 들어왔다. 이들이 말한 건 조용히 묻어두고 알아 두기만 하자. 굳이 이 이야기를 윤현경 중사에게 말해봤자 의미 없다.
-띠링.
의자에 앉자마자 알림이 왔다. 지금 시간에 간부 연락이 올 리가 없는데.
“후훗.”
세하에게서 온 연락을 이제야 봤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당직 근무중이야? 피곤하지 않아? 커피 보내줄까?
-아냐. 괜찮아. 그렇게 힘들진 않아.
-밤새는 게 얼마나 힘든데. 몸 상하는 일은 없도록 해.
-헤헤. 걱정해줘서 고마워.”
“소대장 님?”
“핫? 무슨 일인데?”
“근무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소대장님 찾으십니다.”
“응. 알겠어.”
하필 이럴 때 연락이…. 에휴. 어쩔 수 없다.
“전령. 준비해.”
“네.”
근무지 순찰 준비를 해서 나가야만 했다. 이거도 일이니까.

“소대장님 얼굴 봤지?”
“애인 있으시잖아. 애인 분이랑 문자하고 있었을 걸.”
“하. 솔직히 부럽다. 애인 직접 보고 싶은데.”
“봐서 뭐하게?”
“저주 할거야.”
“…….”
행정반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모두 이 시대의 솔로 였으니까.
“넌 왜?! 넌 애인 있잖아!”
“문 닫아라. 응징을 좀 해야겠다.”
“끄으아악!”
물론. 여친이 있는 용사가 멋대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불똥을 제대로 맞았지만 말이다.

“…….”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한 채, 스크롤을 내린다. 모니터에는 댓글들이 한가득 보였다. 중간중간에는 낮은 별점도 많았지만, 대부분 높은 점수가 있었다. 안티팬은 어딜가나 한두 명씩 있었다.
“선방이군.”
댓글을 보던 나는, 창을 내리고 작업용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대사 콘티와 조금 전까지 작업하던 그림들도 가득 있었다.
“좋아. 이번에도 한번 크게 먹여주지.”
바닥에 내려놓은 에너지 드링크만 3캔 째. 지금 4번째 드링크를 마시면서 태블릿의 펜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크게 히트 치기 위해선, 열심히 그려야 한다. 독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읽어낸다면, 절반은 성공한 거니까.
“후아. 힘들어.”
목 캔디를 챙겨 든 채 방음실에서 레비아가 나왔다. 음악 유튜버로 데뷔한 그녀는 날마다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면서 부른다. 목의 상태를 꾸준히 관리하면서 말이다. 나 역시 작업하기 위해 그리고 있는 컷에 알맞은 음악을 켰다. 전투가 벌어지는 컷에서는 긴박한 음악을, 평온한 컷을 그리는 중에는 잔잔한 음악을 넣어서 그리고 있다. 물론 스토리를 짜고 있을 때 말고.
“나타 님. 잘 되어 가시나요?”
“어. 아주 잘 되어가. 만족할 정도로 말이지. 이 기세로 오늘 밤 안에 전부 끝내버리겠어.”
손이 더 바빠진다. 이번에도 음악을 바꾼다. 레비아도 이를 잘 아는지, 긴박한 음악을 틀고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툭.
레비아는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싹 정리해주고 방음실로 돌아갔다. 역시 내 기분을 잘 알아주는 녀석이라니까.
-후릅.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에너지 드링크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기에 딱 좋은 음료. 컷을 마저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우에오-. 아. 아.”
방음실 문을 닫기 직전 목을 풀기 시작한 레비아의 목소리를 뒤편으로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컷을 계속해서 채웠다.

“검은 고양이가 손을 흔들고~”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방음 부스를 가득 채운다. 녹음만 벌써 수십 번이다. 상당히 피곤하고 목도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 기쁘다.
“조금 더 힘을 줘볼까?
오랜만에 신청이 들어온 오리지널 곡이다. 오리지널 곡은 리믹스 곡과 다르게 자유롭게 불러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오로지 내 해석에 따라 음악을 해야하기 때문에 연습이 그리 쉽지 않은 편이다. 적절한 느낌이 어떤 건지 나 자신과 팬들에게 맡겨야 한다.
“조금 더 밝게요? 네.”
댓글로 조금 더 밝게 해보라는 말이 나왔다.
(음색 진짜 어울린다 ㅠㅠ)
(언니 파이팅!)
댓글에 올라오는 응원의 말과 도네이션에 힘이 솟는다.
“네. 다들 응원 고마워요! 파이팅 해서 갈게요!”
물을 한잔 마시고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좋아. 다시 한번 가는 거야!

(언니 진짜 화장 잘하신다.)
“고마워요 여러분.”
처음에 메이크업을 한번 맡겼다가 팬들이 극찬을 한 덕분에 졸지에 뷰티 유튜버로 데뷔한 하피 언니가 내 앨범용 사진을 위해 메이크업을 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화장이 잘 먹혀서 녹음도 잘 될 것 같다.
“이번 녹음곡은 AKF Striker 님을 위해 녹음한 거니까, 다들 잘 들어주세요!”
(언니 이번 녹음곡 잘되길 응원!)
(앨범 꼭 삽니다!)
“이번 화장은 가볍고 차분하게.”
하피 언니도 합방이라 그런지 이번엔 다소 진지한 모습이었다. 신속하게 화장을 차분하게 해내는 하피 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자, 이 정도면 될 거에요. 레비아 양.”
“어머나. 고마워요.”
앞머리는 살짝 뒤로, 화장으로 희미한 분홍빛을 띤 뺨과 확연 해진 눈매, 그리고 건강해 보일 정도로 옅은 분홍빛의 입술. 그야말로 귀엽고 앳된 모습의 10대 소녀가 있었다.
(여신, 여신 강림!)
(대박!)
댓글창은 폭발.
“다들 고마워요 여러분.”
하피 언니는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눈나! 사랑해요!)
하피 언니의 댓글창도 폭발했다. 보아하니 이번 앨범은 잘 팔릴 것이다. 잘 팔릴 거야.

“그러니까. 이 문제 같은 경우에는 말이지.”
열심히 문제를 풀이해주시는 선생님, 빼곡하게 문제가 적힌 책을 보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했다.
“볼프쌤. 아직 모르겠다람쥐.”
“수업 중에 그런 개그는 썰렁하기만 하단다. 소마.”
“칫.”
“아무튼 잘 모르겠다고 하니.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주겠다. 이크. 벌써 초크가 다 떨어졌나.”
새 워터초크를 꺼내서 수업을 계속하시는 볼프강 선생님이셨다.
볼프강 슈나이더. 엄청난 스펙을 자랑하시는 교사로, 독일 내에서 상당히 따기 힘든 자격증을 몇 개나 갖고 있고, 책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문학남이다. 준수한 외모까지 갖고 계셔서 나, 완전무결한 학생 루나 아이기스조차 반해버릴 매력이 있다니까.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당분간 뒤에 게신 파이 윈체스터 양이 너희를 대신 가르쳐줄 것이다. 꽤 유능한 교사니까, 나 없다고 반항했다간 보고서 양을 두배로 늘려주겠다. 그럼 이만.”
수업종이 울리고, 볼프강 선생님은 파이 선생님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사라지셨다.
“흐아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펜을 필통에 집어넣고 책상에 쓰러진 소마를 옆에서 위로했다. 소마는 나랑 다르게 국어에는 정말로 약했지. 수학은 이상하게 잘하지만.
“수고했어. 소마. 이따가 카푸치노 마시러 가자.”
“카푸치노? 누가 카푸를 친거야?”
“소마. 그만해. 아무도 안 웃는단 말야.”
“알았어알았어. 나도 안 웃긴 개그야. 요번엔 무슨 방송을 할거야?”
“으음.”
최근 나는 스트리밍과 인별그램에 푹 빠져있다. 완전무결한 나 자신을 한껏 뽐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내 팬도 하나둘 늘고 있다.
“같이 춤이라도 춰볼까? 사이트를 **봤는데 이번 레비아의 신곡이 굉장히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추, 춤? 나 몸치…. 앗.”
나 몸치인데. 어쩌지.
“항상 완전무결이라고 하더니, 못하는 거도 있구나?”
“윽, 그, 그런거 아니거든?! 두고 봐! 내 실력을 보여주겠어!”
“오오, 불타오른다!”
소마는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 의미는 단 하나였다.
“결투야! 오늘 주제는 누구의 춤이 더 좋은지야!”
“승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있지!”

“두 아이는 늘 저러고 다닙니까?
“오늘따라 열기가 좀 과하군. 하지만 늘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절대로 싸우는 일은 없거든.”
친가 쪽 조부모가 중국인인 파이 윈체스터 양. 현재 독일 국적을 갖고 독일에서 지내고 있지만 영어,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 한국어 총 4개 국어(본국 언어는 치지 않는다)에 능숙한 인재다. 나 역시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파이 양만큼 유창한 외국어 실력은 불가능하다.
“다들 문제 일으키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들이야. 너무 크게 부담갖지마.”
“그러면 다행이지만….”
교내를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식당에 도착했다. 꽤 저렴한 가격으로 나쁘지 않은 식사를 할 수 있기에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이곳에 자주 오는 편인가?”
“네. 저도 자주 오는 곳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잡은 뒤 요리를 주문했다.
“그건 그렇고…. 현재 어떤가?”
“으 음.”
파이 양은 말하기 힘든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회복도 악화도 안되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파이보다 더 유망주였던 슈에 윈체스터 양. 그 어떤 의사도 난생 처음보는 희귀병에 걸려서 10년 넘는 기간을 병원에서 보내야했다. 오늘날처럼 SNS가 발전하지 않았다면 슈에는 얼마나 괴롭게 지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요즘은 잘 지냅니다.”
“다행이네. 힘든 건 없고?”
“사실은 치료비가….”
“그렇군…. 선후배 관계로서,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겠어.”
“정말 감사하지만, 빚을 지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나 몰라라하고 가면 오히려 더 괴로우니까. 자, 먹어. 오늘 점심은 내가 사지.”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추가로 일을 하는 후배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몸을 혹사하는 거만큼 보기 힘든 거 없거든. 
“선배. 내일 휴가면 언제 오시나요?”
“열흘 정도. 푹 쉬고 올거야. 휴가만큼 좋은 게 직장생활 중에 어디있겠어?”
“앨리스 와이즈맨 씨와요?”
“글쎄.”
앨리스에겐 비밀로 하고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앨리스 역시 회사에 휴가를 내고 같이 떠나기로 했다. 혼자 가는 배낭여행은 재미없다나.
“잘 다녀오세요.”
“그래. 오늘 밤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잘 수 있겠군.”
캐리어는 미리 싸 두었고, 비행기표도 잘 있으니, 오늘 밤 비행기를 타려면 컨디션 유지가 꼭 필요하다.

“오늘부터 겨울방학이구나. 미스틸테인! 또 독일로 돌아갈거냐?”
“응. 그래서 누나에게 연락하고 다녀오게.”
교복을 단정히 입은 은발의 소년 미스틸테인과 붉은 머리칼의 소녀 세크 세크메트가 서로 떠들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세트 세크메트는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고 있어 다소 특이한 인상을 주었다.
“누구냐? 혹시 얼룩 제복 언니?”
“유리 누나 말고. 응. 슬비 누나.”
“그래. 이번 겨울엔 여기 남기로 했다. 같이 놀기로 한 약속도 있으니까.”
둘은 베이커리를 지나던 도중, 발걸음을 멈췄다. 안에는 익숙한 모습이 둘 있었다. 세트가 앞장서고, 미스틸테인이 따라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아, 세트 세크메트 씨랑 미스틸테인 씨!”
둘을 맞이한 것은 금발의 어린 소녀 루시 플라티니였다. 학교 수업이 종료되면 얼른 베이커리로 돌아와서 직접 일을 돕고 다닌다. 처음엔 다소 서툴렀지만, 지금은 능숙함을 넘어서서 벌써 다음 대를 이을 정도라고 한다.
“안녕. 둘 다.”
그리고 등 한가운데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칼의 소녀는 미래였다.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그녀는 큰 크로스 백을 맨 채로,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미래 선생님!”
“선생님 아니야. 나. 그래도 오랜만 이야. 세트.”
미래는 고졸 학생으로, 지금 꾸준히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자원봉사는 예전에 다녔던 유치원에 자원봉사를 이유로 다시 다니면서 어린이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유치원에서 쿠키랑 빵을 대량으로 주문해서 말이죠! 헤헤. 그래서 이번 주말엔 좀 바빠질 거 같아요.”
“응. 철수가 이번에 후원을 많이 해줘서 말이야. 아이들이 좋아 할거야.”
“영화배우 김철수 씨가요? 헤에. 처음 뵜을땐 엄청 무서워 보였는데.”
“무섭게 생겼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고 착해. 그리고 화, 안 내니까 괜찮아.”
“응! 철수는 무섭게 생겼어도 세트 좋아한다! 그나저나 루시. 혹시 남는 메론빵 있냐?”
“메론빵이요? 아쉽게도 메론빵은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대신 망가져서 못 파는 빵들을 모두 드릴게요.”
“왓! 그래도 되는거냐?”
“허락 받았으니까 괜찮아요.”
“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파이 선생님은 꼭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잊지 말라고 했다!”
루시가 건네준 빵들은 거의 두 끼를 빵으로 때워도 될 정도였다.
“크렌베리 쿠키는 없어?”
“여기요!”
아쉬울지도 모르지만 루시는 쿠키나 초콜릿 가공 쪽에서는 실패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유능했다. 그렇기에 실패로 망가진 쿠키가 나올 날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잘 먹을게. 루시.”
“네. 또 와주세요!”
세트는 하교길 내내 빵 하나를 계속 먹었다. 망가졌다고 해도 타버린 빵이 아니기에 맛은 똑같이 맛있었다.
“하아아. 역시 루시가 만든 빵은 맛있는거다! 미스틸테인!”
“응?”
“잘 다녀와라. 파이 선생님에겐 나 대신 안부 꼭 전해주는거다.”
“걱정마. 잘 다녀올게.”
미스틸테인은 세트와 같은 메론빵을 꼭 쥔 채로 웃었다. 둘이 가는 하굣길에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환상향입니다
공모전이 떠서 한번 길고도 짧게 써봤습니다
조촐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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