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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소설

[]세하와 호감도 안경(5)

작성자
사일로시빈
캐릭터
제이
등급
수습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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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me 2015.03.22
  • view2183

4화 : 그는 어떻게 플래그를 꽂는가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2029



"boy..... 이 시간에 치킨이라니... very... rich man...."

"어째 소리가 심상치 않다 싶었더니.... 야식배달을 하는지는 몰랐네요."


 선우 란씨는 오늘도 시체같은 인상이다.

그나마 활력이 좀 생기나 싶으면 오토바이에서 내려오는 순간 모든 삶의 의지를 잃은 것마냥 시들어버린다.

얼음결정이 말라붙은듯 무척 이질적인 하늘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어 늑대를 연상시킨다.

제법 어려보이는 얼굴에 비해 눈은 석류알을 박아넣은듯 새빨개서 정면으로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헐렁한 재킷 사이로 쇄골이 산봉우리처럼 돌출되어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배달.... 취미야... 오토바이... 느려터졌으니까...."

"헥사부사가 아니네요."

"빌어먹을.... 도로교통법...."

"쟤도 이름 있어요?"

"슈퍼....커비.... 그리고.... 만 6천원...."

"아, 맞아."


 준비한 지폐를 꺼내자니 무심하게 손을 내밀고 있던 란씨가 다시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는.... 특급배달했어.... 나 박봉이라서.... 살아있는 거 빼고... 다 옮겨..."

"그런데 그만뒀어요?"

"큰 거... 못 옮기고.... 가죽... 뜯겨지니까...."

"........왜 란씨 뒤에 타는 것들은 죄다 뜯겨나가는거죠....?"

"나는 괜찮지만.... 헥사부사가... 슬퍼해.... so sad..."


  치킨에선  따끈한 기름냄새가 풍겼다. 엄마는 아들 때문에 닭 한마리 시켜먹으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푸념했다.

아니 클로저 하라고 사선을 넘나드는 곳에 밀어넣은게 누구인데 그런 뻔뻔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의무교육이 어쩌고라며 학교까지 보내고.

대한민국의 법정 의무교육은 중등학교까지라고 따졌지만 될 수만 있다면 대학까지도 보내려는 눈치다.


 풀이 죽은 건지 평소처럼 죽어있는지 알 수 없는 란씨에게 말을 건네본다.


"배달은 성에 안 차는 거죠?"

"헥사부사가.... 달리고 싶어하니까...."

"제가 엄마한테 물어봐서 일자리를 좀 알아볼까요? 분명 그 속도가 필요한 곳이 있을 거에요."


 살짝 눈이 커졌다. 정말 표정이 적은 사람이군. 이 사람과 친한 사람들은 이런 미묘한 표정변화를 감지해야 했을 것이다.

호감도를 확인해보았다. 22라니.... 제법 나쁘지 않은 수치인 것 같았다.

비록 너무 빠르긴 했지만, 어쨌든 란씨도 강남에서부터 줄곧 우리와 함게한 동료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둬서 나쁠건 없을 것 같았다.


"어때요?"

"...........thank you, boy. 답례로.... 태워줄게..."

"아뇨.... 뭘 먹기 전에 일부러 속을 비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아요."

 

 란씨는 무척 시무룩해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몇가지 중 하나였다.

다른 배달이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이미 지폐를 챙겼음에도 란씨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마 이 사람의 시간은 달린다/달리지 않는다의 두 가지로 고정된 것이 틀림없다.

달리지 않을 때의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멈춰있는 것이다.


"boy..... 안경..."

"아, 어울려요?"

"not bad..... 하지만 좀 더 꾸미는 게... 좋겠어..."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매번 비슷한 패션이기는 하지만, 코스튬에 신경쓸 정도로 나름 꾸밀 줄 아는 사람 중 하나다.

핫팬츠 아래로는 가젤처럼 쭉 뻗은 다리가 보인다. 가벼우면서도 라이더에게 어울리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패션인 모양이다.


"저기, 옷에 대해 잘 아시면 저도 좀 꾸며주실 수 있어요? 목요일에 약속이 있는데, 잘 입고가고 싶어서요."


 유리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슬비를 만나러가는데 옷도 잘 입을 생각이냐고 놀려댈 것이 틀림없다.

엄마에게도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데이트라도 나가냐며 엄청 놀려댄 뒤에 양복이라도 입힐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대충 요원복이나 교복을 입고가면 대스타를 만나러 가는건데 성의가 없다고 슬비가 화를 내겠지.

목적은 슬비의 기분을 풀어주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정도였으니까, 어느 정도는 입어줄 필요가 있었다.


"okay.... see ya....."


 냅다 다음에 보자고 말하고는 문을 닫아버린다. 시동을 거나싶더니 초광속 항해를 하는 우주선마냥 공간을 도약해 사라졌다.

개조 안 한 오토바이로  저 정도 속도를 내다니. 위상력도 쓰지 않았는데 저런다는 것은 대단한 테크닉을 지녔단 뜻이다.

한편으로는 골목에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무슨 배달원과 대화를 하루종일 하냐고 물었다.

단순한 배달원이 아니라 유니온의 운송 담당 서포트 요원이며, 친분이 있는 사람인데 박봉이라 부업을 하고있다고 설명했다.

엄마는 단지 약간 찡그리듯 웃으며, 유니온은 별로 변한게 없는 거 같다고 쓸쓸히 말했을 뿐이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무시무시한 굉음을 일으키며 찾아온 란씨를 만날 수 있었다.

꽤 기분이 좋았는지 운동장에서 빙글빙글 돌며 모래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길길이 날뛰기에 대표로 나가 중재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인데요."

"시간..... 충분해...."

"밥 먹고나서도 수업이 많다구요."

"먹은 거.... 다.... 도로 나올텐데....?"


 잠자코 탈 수밖에 없다. 정말 주변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른 허리를 껴안았다.

피부가 맞닿을 때는 언제나 긴장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잠깐 기절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시내에 있었다.

아마 내 의식의 일부는 아직 학교에 그대로 유령처럼 남아있을 것이 틀림없다.


"남자의 완성.... 가죽재킷...."

"봄에 입는 거치고 너무 야성적인데요. 카우보이 같지 않아요?"


 지퍼가 가죽 달린 갈색 가죽재킷에 역시 긴 지퍼가 사이드라인을 형성하는 스키니 블루진이라. 알만한 취향이다.

그럼에도 안에 입는 하얀 셔츠는 제법 헐렁했다. 본인이 입는 옷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옷을 고르는 시간과 사는 시간-물론 내 돈으로 사야했다-과 이동시간을 모두 합쳤지만 고작 15분이 걸렸을 뿐이다.

겨우겨우 밥을 먹을 시간이 남았다. 란씨는 보기 드물게 윙크를 하고는 왔을 때처럼 바람같이 사라졌다.

애들이 몰려들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와중에 식판을 들고 인파를 헤치며 끼어들어 앞에 자리를 잡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저 사람 누구야?"


 정미다. 장작불을 물질변환했더니 가시방석이 튀어나온 인상이다.

흡사 위상력이라도 각성한듯 살벌한 오오라가 풍겨서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쩐지 피곤해져서 말을 받았다.


"너까지 왜 그러냐. 그냥 아는 사람이야. 유니온 직원이라고."

".....그런 사람이... 왜 너한테 윙크를 하는데...?"

"내가 옷 고를줄을 몰라서 좀 봐달라고 했어."

"옷? 옷은....왜?"

"목요일에 약속이 있거든."

"임무야?"

"엉? 아냐. 그냥, 슬비랑...."


 정미는 젓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낚싯줄에 걸린 것마냥 유연한 곡선을 그린다.

호감도를 확인하니 어째선지 60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아니,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슬비랑.....? 슬비랑 뭐?"


 그러고보면 정미는 아직도 슬비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해를 하긴 했지만 어딘가 투명한 거리감이 있었다.

아마 슬비와 나처럼, 정미도 슬비와 안 맞는 타입이겠지. 둘이 같이 있을 때는 요즘들어 부쩍 서로를 불편해했다.

괜히 슬비에 대한 화제는 화를 돋굴 것 같으니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니 뭐 그냥.... 일이야.  너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맞아. 상관없지."


 어쩐지 이를 악물고 말하고는, 매섭게 눈을 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웃음을 치고는 등을 돌려 가는 모습이 꿀이 없는 꽃에는 볼 일이 없다고 비웃는 꿀벌처럼 보인다.


 찬 바람만이 남은 전방을 보고 나서 알았다. 분명 내가 또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역시 슬비쪽의 호감도만 신경을 써서 정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탓이다.

게임공략의 최종단계는 동시공략이다. 하지만 난 그 정도의 고수가 아니고, 인간관계에 있어선 초보에 불과하다.

호감도를 100을 찍는게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60-70대만을 유지시키고 싶은 것뿐인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뭔가 문제인지 다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에게는 제법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정미는 여전히 클로저들을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학교를 소중히 하는 녀석인데 그런 학교에 파란을 몰고 온 새로운 인물을 좋아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비는 왜? 설마 내가 모르는새에 또 싸웠나? 슬비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슬비를 찾아가니 석봉이와 대화를 하고있는 중이다. 어쩐지 석봉이는 풀이 죽어서 돌아갔다.

석봉이도 소중한 친구다. 유독 슬비한테만 주눅이 드는 기분이지만. 슬비가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기는 하다.

당장 나만 봐도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쪽을 발견한 슬비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무슨 생각이야 이세하? 아무리 그래도 점심시간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어....."

"갑자기 선우 란씨가 너만 데려가서 무슨 중요한 임무에라도 투입된줄 알았단말야."

"음......"

"그런데 유정 언니도 모른다 그러고, 선생님들은 같은 클로저끼리 왜 모르냐고 그러고...."

"뭘 걱정하고 그러냐. 멀쩡히 잘 돌아왔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불쑥 소리쳤다가, 입을 틀어먹고 시선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리더인데."

"뭐, 나도 좀 놀라긴 했는데 별 일은 아니었어."

"뭔데?"

"내일 말해줄게."

"내일?"

"보여준다고 해야하나?"

"무슨 꿍꿍이니?"

"좀 긴장된다."


 슬비는 아까 흥분했던 탓인지 약간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얕은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거리다가 옆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그래."

"잊지 않았지?"

"너야말로. 준비는 잘 했냐?"

"배우분의 자서전을 구했어. 여기에다가 사인을 받을 거야. 녹음기도 챙겼어."

"녹음기 뭐냐."

"사진기도 충전해뒀어."

"뭘 얼마나 찍을 셈이야."

"일기장도 챙겼으니까."

"너 아직도 일기 쓰고 그러냐?"

"일기는 하루를 정돈하는 중요한 일과야."

"어련하시겠어."

 다음날 슬비는 잔뜩 힘을 준 복장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허리 위까지만 내려오는 굉장히 짧은 하얀 재킷에과 벚꽃색의 셔츠가 제법 산뜻해보인다.

검은 핫팬츠 아래로는 약간 통통한 우유빛 허벅지가 보여서 위로 시선을 올리니, 재킷에 달린 리본이 시선을 따라 흔들렸다.  

낮에 보았다면 좀 더 보기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해가 저무는 시간인지라 색깔이 좀 빛을 바래는 것처럼 보였다.

슬비가 위아래로 이쪽을 훑는다. 


"아세하."

"왜."

"교복이랑 요원복 외에 다른 옷도 입는구나."

"나도 옷 있거든?"

"맞아. 트레이닝복도 있었지."

"뭐, 사실 네 말대로 난 옷은 잘 몰라서. 그래서 어제 란씨한테 골라달라고 했어."

"그렇구나."


 슬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다가와 곁에 섰다.

슬슬 밤을 알리는 네온사인들에 부지런히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초조한듯 몸을 까딱거리던 슬비가 카메라를 불쑥 내민다.


"뭐야?"

"저번에 정미랑... 찍었지?"

"엉? 뭐, 그렇지. 너한테는 안 보냈는데?"

"나랑도 찍어."

"괜찮냐?"

"허락할게."


 입을 뾰족이 세우고는 웅얼거리는 것이 정말 고양이같다.

딱 한번뿐이야! 어디 한번 맘대로 날 쓰다듬어보라고 바보야! 할퀴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안 그러던 녀석이 다가오면 이쪽도 나름대로 부담스럽다. 어쩐지 정미 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심스레 자세를 잡고는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를 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그럴리가 없어. 내가 어제 매뉴얼을 보면서 열심히 설정을 공부했단말야."

"아니 넌 플래시 표시도 모르냐. 이건 자동설정이라고. 내가 좀 만져볼게."

"앨범은 보면 안 돼."

"기왕이면 앨범도 비우고 오지 그랬냐. 이건 용량이 정해져 있다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신호등의 파란 불이 멎었다. 슬비가 살짝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린다.


"이러다 촬영 시작하면 어떡해."

"사이킥 무브로 가면 되잖냐."

"임무수행 중도 아닌데 위상력을 그렇게 사적으로 쓸 순 없어. 게다가 횡단보도에선...."

"...알았으니까 웃어. 다시 찍는다."

"..........읏."

"너 왜 웃지를 못하냐."

"기, 긴장했어. 너야말로 왜 날 비웃니?"

"야, 나도 웃은 거거든? 역시 웃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네"

"잠깐. 이러면 내 얼굴이 더 커보이잖아."

"각도상 어쩔 수 없다고."

"네가 키를 좀 낮춰봐."

"아니 네 키가 작은 걸 왜 나한테... 야. 꼬집지 마라?"


 결국 사진도 무사히 찍었고, 촬영장에도 너무 늦지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통제요원이 있어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사실 나한테는 제법 실망스런 풍경이었다.

스태프들이 이미 바리케이드를 치고 촬영을 시작했고, 정작 주인공인 배우들은 거리 탓에 무척 작아보였다.

촬영장 근처가 특히 조명 덕에 무척 환했는데, 그럼에도 난 배우들의 얼굴을 잘 알아** 못했다.


 슬비는 만족한 눈치였다. 녀석은 촬영장에 있는 배우들보다 빛나고 있었다.

두 눈 가득 반짝이는 동경이 담겼고, 금방이라도 핑크빛 광선을 쏠 기세였다.

그 두근거림이 이쪽에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어쩐지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두근거렸을 것이다.


 휴식시간이 되었음에도 녀석은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계속 손과 발을 애벌레마냥 꼼지락거리며 땅만 바라보고 있다.


"안 가냐? 사인 받는다며."

"그치만.... 실례가 되지 않을까해서..."


  그렇게 열렬한 팬이면 팬답게 좀 꺅꺅 민폐라도 끼칠줄 알았더니 학교에서보다 다소곳해졌다.

답답해져서 녀석의 손을 잡아끌자니 그 떨림이 느껴졌다. 다행히 물어보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여배우가 이름을 묻자,


"이, 이, 이, 이, 이슬비라고 해요."

"무척 이름이 기네요."


 그런 농담에서 이 사람은 꽤 좋은 사람임을 느꼈다. 너무 흔한 일이라 프로의식이 투철한 걸지도 모르지.

사인을 받고나서 슬비는 더듬더듬 가보로 삼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배우는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팬을 돌려주면서 장난스레 웃었다.


"멋진 남자친구를 뒀네요."

"흐엣?!"

"잘 지내요. 드라마에서처럼 싸우지말구요."

"아...... 읏.... 네...."


 당연하단듯이 남자친구로 인식되었다. 굉장히 부끄러워서 뭐라 대답할 틈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거기서 왜 네라고 대답하는 거야 저 녀석은. 정말 바보 아냐? 유리보다 바보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이세하. 날 꼬집어봐."


 그래서 딱밤을 때려줬더니 냅다 박치기로 명치를 가격했다. 예상치못한 반격이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이마를 감싸고 으르렁거린다.


"너 말 못 알다듣니?!"

"꼬, 꼬집으면 아프잖아."

"이건 안 아프고?"

"너야말로 여자애가 박치기가 뭐냐 박치기가..."


 ** 고양이는 털을 잔뜩 세우고 앞발로 바닥을 탁탁 긁어봤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게 문제다.

이후 진정한 슬비가 한숨을 반 토막 내쉬며 바닥을 보고 중얼거렸다.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드라마 안에 있는 거."

"난 네가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당하면 어쩌려나 걱정했는데."

"노, 놀리지 마."


 녀석은 촬영현장의 사진을 몇 번 찍고는, 낮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아쉬워했다.

녀석의 호감도는 80 근처에서 머물러 있었다.


 조그만 콧날과, 푸르스름한 눈동자와, 아기의 발바닥같은 귀와, 초승달같은 눈썹과, 케이크에 올린 체리같은 입술을 차례로 보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옷까지 차려입고 같이 올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걱정이 되서 따라온 건가 나는? 이 녀석은 그런 게 서툴러서?


 나는 슬비를 어떻게 생각하는걸까. 호감도 안경은 그런 것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두근거리는 정도가 긴장감인지, 공포인지, 흥분인지, 사랑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른 이의 호감도가 호의인지, 동정인지, 편안함인지, 사랑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이 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밤이 어둡기 때문이다.

어둠이 두려운 이유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숫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그런 호의가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에게 호의를 되돌려준다는 것은, 생각 외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라는 것은 욕심이 불과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슬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세.... 세하야."

"응?"


 우린 다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밤이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고, 사람들은 분주히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다닌다.


"고마워."


 수많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그 말만은 분명히 들렸다.

슬비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살짝 우는 것 같기도, 찡그린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어조는 혀로 몇 번을 고심하면서 조각을 새기고, 아기의 손가락을 잡듯이 무척 부드럽고 조심스런 과정에서 고른 느낌이었다.

나는 딱히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슬비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푸른 거울의 안쪽으로 내 얼굴이 매달렸다.


 신호등이 불이 녹색으로 바뀌고, 많은 이들이 건넜지만 우리는 잠깐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난 녀석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고.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멍청했고, 동시에 두려운 질문이었다.

이건 투포환 같아서 지금까지 쌓아올린 탑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을 중대한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던지면 녀석은 바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난 녀석에게 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다.

난 실은 널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 질문 역시 대답은 마찬가지일 터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는 그 한 걸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숫자의 너머에 있는 문제다.

굳이 무리해서 길을 건널 필요는 없었다. 길 위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 아니다.

여기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다.

 

 신호등의 불이 다시 적색이 되었다.

슬비와 나는 가만히 흘러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잔상을 남기며 뇌를 스치고 지나가는 빛줄기들이, 마치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처럼 보였다.




++


 선우 란이 타는 배달용 오토바이는 그 유명한 혼다의 슈퍼 커브.

22는 국내 고속도로에서 기준속도와 제한속도의 차이. 즉 80km 제한일 때 22를 더한 102km로 달리면 단속대상이 됩니다.

우란이는 매력적이지만 김시환이라는 공인 커플링 때문에 히로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뜬금없이 란이 등장한 이유는 이번 봄 코스튬이 얘랑 스타일이 비슷해보여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봐도 봄 코스튬 스타일이.... 라이더 스타일이야...


초속 162cm는 지름 0.4mm의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속도. 그리고 이슬비는 지름 0.2~05mm의 작은 입자의 빗방울이죠.

그런데 속도가 저게 정확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제목은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라는 초속 5cm의 패러디입니다.


 미연시같은 느낌이 났다면 좋겠네요.

드디어 다음에야 유리가 메인으로 나오겠어요. 너무 길어졌지만 절반은 건너온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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