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건 예의 그 섬찟한 탐욕만이 아니었다
※ 불꽃 레이드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한 번 해보는 불꽃의 딸(교주) 날조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건 예의 그 섬뜩한 탐욕만이 아니었다.
* * *
끝이 보이질 않는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귓가로 어딘지 익숙한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걸 과연 ‘노래’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할까. 보통 노래라고 한다면 가사가 첨부된 곡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림이 듣고 있는 ‘그것’은 가사도 하나도 없는, 그렇다고 콧노래라고 부르기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림이 이걸 일종의 ‘노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강림은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가 섬기는 교주의 바로 옆자리에서.
애초에 감히 그들이 모시는 신과 비슷한 목소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은 교주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그들의 교주는 재주가 좋아, 만약 보통 사람들이 흉내 냈다면 의미 모를 포효나 다름없을 만한 그들만의 찬송가를 한 가닥의 아름다운 노래로 둔갑할 정도의 능통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익숙하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렸다고 표현한 것이다.
아무튼 이 노랫소리가 이 복도에서 들렸다는 것은 잠깐 외출을 한 그들의 교주가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랫소리를 따라가자니 당연하게도 그들의 교주인 불꽃의 딸이 있었다. 불꽃의 딸의 옆에는 이번 외출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후드 망토가 개져 있었다.
평소 교단 내에서 교주를 상징하는 의복을 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불꽃의 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강림이 문안 인사를 했다.
“돌아오셨습니까, 불꽃의 따님이시여.”
“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고, 또 활기찼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그녀가 갑자기 등장한 강림에 의해 놀랐다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갑자기 자신의 뒤에 등장하는 목소리에 – 그 목소리가 아무리 자신의 지인이라고 할지라도 일단은 한 번이라도 - 놀랄 법도 하지만 불꽃의 딸은 태연하게 강림의 말을 되받아쳤다. 이런 경우면 보통 두 가지 경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놀라기는 했으나 그것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 또 하나는 주변 눈치가 좋아 뒤에 느껴지는 인기척을 즉각 감지했을 경우였다.
불꽃의 딸은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으나,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경우에 가깝기는 했다. 교단의 건물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인물은 현재 시점으로 강림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강림의 경우는 감히 교주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도 황송하여, 주로 그녀의 뒤에서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의 주인은 대부분 강림인 것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웬만한 것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탐하는 것에는 비단 물건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녀가 탐하는 수집품 목록 중에 당당히 자리했다. 그렇게 지식을 탐하고, 탐한 지식들이 점차적으로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측 같은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예로부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예측은 무척 정교해져서 이제는 예지라고 일컬어지는 수준으로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걸 추리라고도 한다고 하던데, 그녀는 추리보다는 – 그녀 자신은 자신의 이러한 점이 추리에 더 가깝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 예지라고 하는 단어를 더 선호했다. 뭐든지 성스럽게 보이는 편이 교주라는 자리에 위치한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모저모 쓸모가 많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림은 괜찮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무척이나 안도했다.
불꽃의 딸이 성전 바깥으로 ‘홀로’ 외출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성정이 신도들을 호위 병력마냥 끌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여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강림만큼은 꼭 그녀와 같이 동행하였다.
그래서 이번 외출에도 꼭 동행하고자 했으나, 그녀가 강림을 말렸다. 혼자 가도 위험한 일이 생길 곳은 아니며 –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 땅이 그녀 자체를 귀하게 여겨준다고 했다 – 이번 외출의 목적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극소수의 인원이 의식에 참여하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하였기에. 그래서 강림은 그녀의 신변이 무척이나 걱정되었음에도, 얌전히 그녀의 명령에 의거해 성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강림이 이어서 물어봤다.
“원하시던 것은 손에 넣으셨나이까.”
“덕분에요. 이렇게 또 지식을 충족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또 그녀만의 수집품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라면서 불꽃의 딸이 운을 더 떼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것’을 지켜보는 과정 자체도 무척이나 흥미로웠어요.”
“그렇습니까?”
“네. 보통의 인류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하고, 곁눈질로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그런 존엄하고 위대한 장면이었어요.”
보통의 사람들이 아무런 보았다면 자칫 정신이 붕괴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음에도 비교적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자신을, 흉몽의 군주와 성녀와의 천재지변과도 같은 전투 속에서 태연히 ‘지식’을 습득한 본인을, 불꽃의 딸은 되러 기특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마나 오만한지. 그러나 이 높은 자신에 대한 기대감과 충족감, 자신감이야말로 그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녀가 이렇게 – 위상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고 자체를 평범한 인간임을 상정한다면 -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것으로 저의 아버지, 불꽃께서 이 땅에 도래할 날이 머지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새삼 그녀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순수한 감도의 환희가 퍼져 나왔다.
불꽃. 교단이 섬기는 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신의 아이인 불꽃의 딸이 교주가 된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교단’을 만든 건 그녀이긴 했지만,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여서, 별로 입씨름하기에 좋은 주제는 아니었다.
아무튼 간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불꽃의 도래는 그녀 개인뿐만이 아닌 교단 모두의 숙원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무(無)에서 – 완전한 무(無)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기는 했다 – 현재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소모되었는지, 새삼 그러한 과정을 교주가 개인적으로 회상해보자면 감격뿐인 순간이 꽤나 많을 정도였다.
불꽃의 딸은 드디어 10년도 넘게 고대하던 순간이 정말로 다가왔음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손을 그러모았다.
“그러니 우리, 같이 기도할까요?”
지금 그러한 환희의 감정을 터트리기에는 무척이나 시기상조였기에 – 애초에 그녀의 아버지는 도래하지도 않았다 – 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극단적으로 평온하게 하기 위한 그녀 나름대로의 조치였다.
그녀의 뜬금없는 기도 타령에도 강림은 아무 의심 없이 그녀와 따라, 똑같이 기도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분한 기도문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아버지, 불꽃의 뜻대로.”
* * *
그녀의 삶은 제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평범함과는 역시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와 관련하여 울분이라든지 좌절이라든지, 일명 신세 한탄이라고 할 수 있는 걸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로서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여겼다.
역시 이런 섬뜩한 성정은 그녀의 아버지, 불꽃을 쏙 빼닮았기에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아버지를 쏙 빼닮았으니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기 전까지의 그녀의 삶은 참으로 무료했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사는 삶이란, 끔찍했으니까.
물론 이건 모든 이들이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니니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거기서 아주 어렸지만 그녀는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의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이런 평범한 삶, 세상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욕망’은 어리고 경험조차 전무한 그녀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질적으로 낯설며 날이 선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해결책은 보통 두 가지였다. 그녀가 변하든가 – 변하는 척을 하든가 - , 아니면 이 세상이 변하든가. 그리고 자기 자신이 너무도 소중했던 그녀는 당연하게도 – 자기 자신이 너무도 소중했던 그녀에게는 그녀가 변하는 척을 하는 것도 그렇게나 소중한 그녀 자신을 오염, 훼손시키는 행위였다 - 후자를 원했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이 세상이 변혁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리기만 했던 그녀는 그에 대한 적절한 방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 불꽃이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 그 날, 그녀는 얼마나 환희에 차올랐을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절대 모른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심했다.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며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던 것을, 실제로 인정도 해주고 실현해줄 존재와의 첫 교류였으니까.
과연 그녀의 아버지의 말씀은 그녀에게 있어서 ‘구원’이었을까?
구원까지는 아니었다고, 지금의 그녀라면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깨달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 – 얼마나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면모를 잘 물려받았는지 – 인지, 어떤 삶을 살아도 되는지를 넌지시 알려주는 건 그저 길을 제시했을 뿐이지, 구원 같이 거창한 건 아니었다.
나의 삶을 눈에 띄게 바꿀 정도는 되어야 구원이지, 그저 길을 제시해주는 건 구원 따위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불꽃은 그의 딸을 깨우치는 데 너무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좋다고 일컬어도 될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를 얼마만큼 믿고 따르는 지와는 별개로, 그녀 또한 그녀의 아버지가 따르는 ‘위대한 그분’에 대한 숭고함은 저절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기 전의 살아왔던 환경이 특정 신앙을 미치도록 믿는 집안이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살아오던 곳은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마저 신병(神病)이라고 치부하며 병원 같은 곳으로 데려가지 않았던 집안이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왔는데, 초월적인 존재 - 우리들을 만들어낸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 - 에 대해 그분의 옷자락 한 올이라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데, 그녀는 당연하게도 자연히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그분의 강림. 그보다는 약할지언정 그녀의 아버지의 도래는 그녀가 원하는 이 세상의 변혁의 초석이었다.
여기까지 단숨에 무섭도록 깨우치게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었다. 무료하기만 하던 삶에 드디어 그런대로 괜찮고 멋스러운 목적이 생겼다.
* * *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건 예의 그 섬뜩한 탐욕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름 지략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걸맞은 훌륭한 웅변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군단장이라며 하나의 군단을 통솔하는 데,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 또한 가지고도 있을 것이다.
딸은 자신의 아버지의 그러한 점들마저 쏙 빼닮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라면,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사로잡는 재능을 타고난 자로 일컬어질 만큼.
그녀는 이런 자신의 재능을 십분 이용했다. 젊은 나이 –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의 나이 - 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통솔력과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랐을 테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프로미넌스, 일명 ‘교단’을 만들어낸 때의 나이는 젊다 못해 어린 축에 속한 나이였다.
그리고 보통 이런 나이 어린 대표자를 앞세운 집단은 숨은 실세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녀의 교단에서는 그러한 일은 일절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부터가 평범한 인간 사회에서 상식적이라고 통용될 만한 인재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손수 일구어낸 교단이 인간 사회 내의 보통의 – 불꽃의 딸은 이를 간혹 ‘얄팍한’이라고도 표현했다 – 법칙을 따를 리가 전무했다.
때론 세간의 당연한 상식이라며, 평범함의 틀에 갇힌 족속들이 어리석고 가엾기까지 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 수학 공식마냥 정립이 가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하나 특별하다고 착각을 하는 듯 했지만, 그녀가 보기엔 그들이 일명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허용 범위 내의 변수 정도였다.
아무튼 이렇게 일반인의 행동 패턴이 변수마저 잘 정리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가.
포교가 쉬워지게 된다.
-이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은 적, 없으신가요?
-저는 당신의 가치가 여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래마지 않아요.
-가엾게도...당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제가 있으니까요.
어린 소녀가 자신의 본질을 꿰뚫고 심지어 위로까지 해준다는 건 단순히 그 소녀가 조숙하다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경이로움, 조금 지나치게 과장까지 보태자면 신의 사자(使者)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 같이 느꼈을 것이다.
홀로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거치고 교세(敎勢)가 엄청난 속도로 확산이 되었던 것은 그녀의 이런 면모가 톡톡히 빛을 발휘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제례 의식에 – 물론 이것도 그녀의 지극히 주관적인 사고방식이지만 - 필수적인 ‘제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씩은 제물이 육성되고 있는 섬으로 잠행을 하곤 했다. 뭐든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잠행은 쉬웠다. 나이에 맞게 어려보이는 외모가 이럴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 제물들은 대부분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위주로 키워냈으니까. 거기에 조금 허름한 옷으로 변복만 한다면 섬에 흔히 있는 아이들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여러 섬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무슨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훔쳐본 곳에는 한 소년과 자신보다도 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안겨 훌쩍이고 있었으며, 소년은 그런 소녀를 다독여주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소녀를 지키기 위해 소년이 차원종에게 다치게 된 모양이었다. 그 다친 쪽이 한쪽 눈이라는 것은 소년에게 감겨져 있는 붕대의 위치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다친 것에 원망을 토로할 법도 한데, 소년은 그런 거 일절 내비치지 않은 채로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쪽 눈은 잘 보여. 그럼 된 거지...이렇게 다시 널 볼 수 있으니까.
목소리는 다정했고, 표정은 부드러웠고, 소녀를 안아주는 기색에서는 소년이 소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그 때, 그녀의 안에 있던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직후 현실에 분명 존재할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 *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옆에서 묻는 물음에 그녀는 갑자기 떠올라서 곤란하던 과거 회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옆을 보니 그 때 그 소년과 다친 곳이 똑같은 남자가 자신을 경이롭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예전에 보았던 무언가와 결이 비슷하다는 것에 그녀는 옅게 미소 지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라니...”
여기까지 말하고서 강림은 곧장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이 감히 알아야 할 의무 따위는 없는 것처럼. 사람보다는 거의 도구에 가까운 마음가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꾸어낸 수집품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 그 계기를 깨닫게 해준 것도 강림이었지, 아마.
그녀는 처음부터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왔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어째서 인간들 중에도 희소한 수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것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그녀가 봐온 수많은 인간들을 하나같이 평범하게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돌멩이들 중에서도 보기 좋게 때깔이 고운 것이 있다는 것을 강림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역시 뭐든지 경험해봐야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쓸데없이 옛 생각에 잠기게 되었을까. 그녀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을 보는 위인이었다. 과거의 일은 기껏해야 ‘지식’의 수준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고작인 그녀에게 있어서 이렇게 감상적인 과거 회상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게 되었다.
이세하. 또 하나의 반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귀중하고 희소한 존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처럼 반신이 아닌 인간들을 – 하물며 제아무리 위상력에 각성했다고 하더라도 – 살짝 낮추어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또 한 명의 반신이라니.
...얼마나 값질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만나게 될 날을, 그를 손에 넣게 될 머지않은 미래를.
[P.S]
1. 불꽃딸이 너무도 제 취향으로 나와서(외모든, 성격이든, 캐릭터성이든) 5개월 전부터 써보고 싶었는데 불꽃 레이드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겨우 쓰게 되었습니다.
2. 앞선 당구장 표시에서 날조라고 되어있던 만큼, 아직 설정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게 많은 것 만큼, 불꽃딸의 감정선이나 성장 배경 같은 건 당연히 제 추측이 많습니다.
3. 쓰면서 불꽃딸의 오만함이 잘 배여나오도록 단어에 신경을 쓴 부분이 좀 있습니다.
4. 앞부분의 불꽃딸의 노래 부분은 불꽃딸이라면 평범한 노래도 잘 부르겠지만, 특이점을 생각하다보니 어느 소설에서 본 용을 일깨우기 위해 용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노래를 부른다는 부분을 채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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