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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black knights 2부 2화 증오의 창

작성자
firsteve
캐릭터
서유리
등급
정식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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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me 201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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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전날의 방 안에는 고요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기사단을 통솔하며 생긴 버릇이었다.


홀로 있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그였건만, 마모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어버린 그에게는 어느새 하루의 일부처럼, 다음의 일에 대해 사색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누가 보면 철들었다 하려나... 그의 말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18살의 이세하는 그날 죽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모두를 구원하고 모든 악을 짊어지고 사라질 악의 화신 일 터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의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아니, 처음부터 있었던 균열이었다.

아무리 마모되어도 그가 [이세하]로 있을 수 있게 지탱해주는 기억이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용이 되지 못했다.

영웅이 되지 못했다.

차원종이 되지도 못했다.

인간의 언저리에 서서 흉내를 낼 뿐이었다. 인간의 흉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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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은 창문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환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옷을 정비하고 밑으로 내려가자, 한 남자가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청색의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튀어나온 남자의 모습에 세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오셨네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컨디션은 최고지. 조정도 막 끝낸 참이다."

팔을 돌려가며 말하던 그가 세하를 바라보더니 운을 뗐다.

"아이러니하게도, 너한테는 내가 두 번이나 빚을 지는구나. 호박 건에 대해서도, 이번 건에 대해서도."

"아저씨..."

"고맙게 생각한다. 기회를 줘서 말이지."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너털웃음을 짓다가 세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알아봐달라는 건 어떻게 됐냐?"

"잘 살고 있어요. 오히려... 행복해 보일 정도로요."

그렇지. 그 녀석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녀석이니까.

남자가 담배를 물려다가 곧바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탕을 꺼내 물었다.

"그거면 됐어. 그 녀석이 행복하다면."

"누나는... 아저씨를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안 갈 거예요?"

"그 녀석은 착하니까. 나처럼 비뚤어진 녀석까지 걱정해주는 거겠지. 그 녀석의 옆은... 내 자리가 아니야. 그 녀석은.... 더 좋은 녀석을 만나서 행복해야 해. 그거면.... 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남자가 세하를 흘긋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마, 민망함이 주요한 감정일 터였다. 10년 전, 그렇게도 최악이었던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생각이 남자는 민망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됐다. 자신의 앞에 있는 세하도 자신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놓일까 봐.

그렇게는 절대 안 만들 거야.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것이, 김기태에게는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었다.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애써 추스르고, 회의장으로 들어가자, 10여 명의 간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짓으로 가볍게 회의장 인원들을 앉힌 세하가 상석에 앉자,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습격 10시간 전, 마지막 의견 교환 시간입니다. 대체적으로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려 노력했습니다만, 방안의 문제점이나 작전에 추가할 점에 대해 말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말하실 분은 손을 들고 발언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하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하가 손을 들자, 간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처음부터 손을 들자, 의아함보단 당황함이 앞서 나왔다.

"오라버니?  혹시 개선할 점이라도 있나요?"

"그냥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내게 붙을 호위 병력을 두고 가고 싶어. 군살이 좀 많은 것 같아. 대신에, 너랑 헤카테를 데려가고 싶은데, 다른 간부들의 의견은 어떤가?"

잠깐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회의장은 금세 평화를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중간한 호위보단 하연이나 헤카테 같은 간부급을 데리고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간부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의 걱정이 남았다. 방위선의 공백. 그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세하가 조용히 덧붙였다.

"안드라스. 너에게 내가 이번 작전으로 나가 있는 동안, 이곳의 방비를 위임하겠다. 기사단의 남은 인원들은 그를 보조해서 이 땅을 지켜내라."

신뢰가 묻어나는 말과 눈빛에 안드라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신 안드라스! 용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곳 성지에 그 누구의 발도 허용하지 않겠나이다!"

"부탁할게, 라스. 자, 그럼 이걸로 방위 문제는 일단락됐고... 다른 의견 있나?"

세하의 물음에도 답이 돌아오지 않자, 세하가 회의장 책상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견은 없는 듯 같으니, 각자 맡은 부분에서 작전 준비에 소홀함이 없게 해주길 바란다. 이상."

말을 끝낸 세하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팔찌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많이 변했으려나.

불안감이 묻어나는 혼잣말이 여지없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변했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에서 확실한 세상의 [적]이 되었고, 피를 보고 무언가를 도륙한다는 행위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이세하 라는 존재를 바꾸어버렸다.

이런 나라도 받아줄까.

답이 돌아오지 않는 끝없는 물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어서서 걷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마음먹고 걷기 시작했던 길이니까. 설령 그것이 끝없는 물음이 가득할지라도 그는... 걷기로 했다. 이 연옥을. 이 지긋지긋한 악몽이자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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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착실한 계획이 큰 역할을 했지만, 강습 역할을 맡은 기태의 활약이 특히나 한몫을 했다. 김기태. 유니온 전(前) A급 요원. 실력만큼은 S급이었다고 전해지는 남자가 자신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육체와 더할 나위 없는 전**의 힘으로 유니온을 향해 반역의 이빨을 드러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연구소의 가드들은 비상체계를 발령하며 그를 따라나갔다. 덕분에, 휑하게 비어버린 연구소 로비를 지켜보던 세하가 옆에서 대기하는 헤카테에게 눈짓을 했다.

시작해.

그것이 명령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명령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준비한 기계를 가동했다. 짧은 기동음과 함께 세하를 포함한 인원들이 단숨에 연구소 로비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떨어졌다. 승차감은 별론데. 그래도 한 번에 5km나 되는 거리를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한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작전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세하가 하연을 돌아보자, 그녀는 로비 중앙에 있는, 조각된 바닥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4와 15를 표현했다. 지하 4층, 15명. 그것이 그녀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상했다. 어째서 강습부대로 인해 가드들이 대거 빠져나간 이곳 연구실에 15명이나 있는 것인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문득,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반 연구원들은 빠져나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검을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연구원들에게 가보기로 했다. 아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려가실까요, 오라버니?

하연이 세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세하의 생각을 읽은 것이다. 세하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예전 고전 게임에서 보았던 그 기술로 그는 이곳을 뚫을 생각이었다. 붕권. 어느 게임의 격투 바보의 주특기. 그것이 바닥을 향해 내질러졌다. 소리마저 고요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로비인 1층부터 지하 4층까지 원통으로 된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순수한 무력. 무자비한 폭력에 바닥은 찢겨나갔다. 자세를 되돌린 그가 사뿐하게 구멍으로 내려가자, 그 뒤를 따라 기사단원들이 내려갔다. 내려간 곳에서 그들이 처음 본 것은 겁에 질린 연구원들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유리 세공품 같았다. 대화가 통할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세하는 산책하러 나온 듯 가벼운 말투로 연구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반응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하연이 세하를 흘끗 봤다. 아무리 기태가 강습부대로 시선을 끌어준다 한들, 시간을 지체하면 상급 요원들이 와버리게 된다. 그쯤 되면, 기사단 쪽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걸 세하도 아는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 쓰고 싶은 물건은 아니지만.

세하가 막대기를 입에 물었다. 파이프 오브 하멜른.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였다. 그리 완성도 있는 곡조는 아니었지만 꽤나 청아한 음이 들리자, 연구원들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일종의 최면상태였다.

"좋아... 그럼 질문을 할게요. 비밀연구실 구조 아는 사람 있나요?"

그러자, 얼굴이 핼쑥한 연구원이 손을 들고 구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자세한 내용이었던 탓에 세하가 길을 안내하라며 그를 재촉했다. 세하의 지시에 연구원이 옆에 있던 버튼을 조작하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졌다.

이런 방식으로 길을 숨겨뒀군요.

니케가 안경을 밀어올리며 중얼거리다가 세하를 바라봤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희 분석팀을 둘로 나눠도 되겠습니까?"

니케의 요구에 세하가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이곳에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한 팀은 이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한 팀은 저와 함께 폐하를 따라 정보를 수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보에 관련된 것은 니케와 아라의 전문분야였다. 그렇기에, 세하는 두 말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는 연구원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발자국 소리가 침묵을 일깨우며 도착한 지하 5층은 어둠에 휩싸여 앞을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용의 눈은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피비린내 나는 영혼들의 흔적이 5층에 널려있었다. 세하가 연구원에게 채 캐묻기도 전에, 연구원이 어둠 속으로 도주했다. 그와 동시에, 5층의 불이 켜지며 5층의 악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쉽게는 안 풀리나.

세하는 한순간 냉정을 잃었다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최면을 어떻게 푼 것인지는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눈앞의 악령들이 중요했다.

"당신들은 누구지? 여긴 분명 출입 금지구역일 텐데?"

"찾을 자료가 있어서 말이지. 유니온의 뒷모습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좀 보러 가도 되겠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그였지만,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는 위상력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소용이 없으니 빈틈을 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좁은 곳에서의 전면전은 사양이었다. 침묵이 흐른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요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우려했던 전투였다. 

하는 수 없나.

세하가 손가락을 풀며 전투에 들어가려던 그때, 그에게 전음이 날아왔다.
Targets on line. 헤카테의 전음이었다. 그녀의 전음에 세하가 느긋한 어조로 항복을 권유하지만 그들은 자세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할 수 없지, 뭐. 헤카테. 지워버려."

짧은 그의 명령이 요원들의 머리에서 채 이해가 되기도 전에, 엄청난 빛줄기가 요원들을 휩쓸며 뻗어갔다. 단 한 줌의 재와 먼지조차 없는 절대적인 소멸의 빛은 헤카테가 무기를 내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하여간 음침해. 조용히 숨어서 그런 걸 준비해두다니. 이러면 내가 활약할 게 없어지잖아."

"평소에 현장 작전할 때, 활약할 틈도 안 주는 사람이 누구였더라?"

살짝 경쟁심을 불태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건 탄 냄새뿐인 참혹한 비경(悲景)이것만 그는 이 상황에서조차 웃음이 나왔다. 마치, 옛날의 검은 양 같은 티격태격 함이 잠깐 그를 현실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정보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투닥거리는 둘을 달래며 다음 층으로 내려간 세하가 메인 컴퓨터를 발견하고는 니케에게 정보 회수를 명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해킹 불가. 지금껏 니케가 뚫지 못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사라져버린 멤버들의 행방과 유니온의 일부 문서만이 그의 몇 안되는 실패였건만, 이번에는 어이없는 곳에서 그가 실패를 선언했다.

"니케. 설명해봐. 어째서 해킹이 불가능하다는 거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메인 컴퓨터는 생체 인식으로 작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강제적인 해킹을 할 시에는 내부의 데이터가 소멸되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어서 해킹이 불가능합니다."

한 방 먹었다. 그는 이 상황을 그렇게 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생체 인식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들어온 자신의 부족함을 원망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연아. 이 층 밑으로 사람의 흔적을 탐지할 수 있겠어?"

모 아니면 도인 수였지만 희망의 한 수이기도 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군말 없이 탐지범위를 밑으로 확장했다. 그 순간, 하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틀거렸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비집고 나왔다.

지하 7층의 흔적은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8층은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본능적인 혐오를 넘어서는 혐오였다. 만약, 조금만 더 길게 탐지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속을 비워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연이 뒤집히려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세하에게 자신이 탐지한 걸 보고하자, 세하가 으르렁거렸다.

첫 보고 때, 아라가 알아냈다는 그건가.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온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이곳에 왔던 이유 중 하나이자, 오늘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을 찾았다는 생각에 세하는 분석팀과 헤카테에게 여기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7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잠겨 있는 문이 그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가볍게 문을 뜯어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꽃밭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지옥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수십 개의 바늘이 꽂힌 채 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부터 살아있는 건지조차 의문인 사람까지, 그의 눈은 그 모든 것을 담아버렸다. 뒤늦게, 그를 따라내려온 하연이 7층의 지옥을 보고는 부들부들 떨며 수감된 사람들의 위에 설치된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것은, 외견보다 더 참혹했다. 일반인이었다. 기억 조작 35회, 위상력 주입 실험 25회, 개조 실험 75회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데이터였다.

"유니온...이 개 xx들이 진짜...!!!!!"

세하의 입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범죄자들이라고 해도 이건 용납이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피실험자들을 일반인으로 사용한 건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열했다. 그것이 그의 분노를 앞당기는 방아쇠가 되었다.

오늘, 이곳엔 생명체는 없다.

자비 따윈 없는 발언이었다.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여전하군요, 쿡쿡...

너무나도 낯익은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시환이 형?

그의 입이 누군가의 이름을 담았다.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간 곳에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이 배어있는 시환이 있었다.

"형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왜 형이 이런 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냐고요!"

세하가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시환을 향해 되묻자 시환이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 덕이죠. 당신 덕에 잊고 있었던 클로저 시절의 혈기가 되살아나서 조금 무리를 했죠. 그것 때문에 실험도 많이 받았지만 다 소용이 없더라고요. 전에 위상 능력자였던 게 득이 됐죠, 쿡쿡... 쿨럭...!"

시환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환이 형!

세하가 다급하게 창살을 뜯어버리고 들어가자, 그의 몸에 시환이 기대 말을 이어갔다.

"하아... 세하 군. 내 말 잘 들어요. 아까 연구원들이 8층에서 [폐기 처리] 들과 놀러 간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지체하지 말고 당장 8층으로 뛰어가요. 가서 박살 내고 와요. 그리고, 만약 연구소장이 거기서 나타난다면 조심해요.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에요."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시환의 모습에 세하가 입술을 꽉 물더니 그를 창살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를 꺼내 그에게 주사했다.

"조금만 버티고 있어요. 금방 다시 올게요."

세하가 하연과 함께 8층으로 뛰어내려가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녀와요... 세하 군... 부디... 이 지옥에 끝을 내줘요..."

한편, 그 시각, 조금 떨어진 위치의 한 건물 안,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청년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역시 그인가요?

청년이 무심결에 감정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감정이 드러난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보도록 하죠.

청년이 짧게 통화를 끝내고는 벽면 한 쪽에 걸려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보겠군. 그 낯짝을.

청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창을 집어 든 그가 발코니로 걸어 나와 창문에 발을 걸치고는 가볍게 사이킥 무브를 시작했다. 목적지는....이세하가 있는 연구소다.

의문의 청년이 연구소를 향해 오고 있을 무렵, 세하는 어느새 8층의 문까지 도달했다. 7층과 마찬가지로 문이 그를 반겼지만, 상관없다는 듯 그는 문을 뜯어버렸다. 그러나, 그 안의 모습은 7층보다 더 참혹했다. 그것은 광경(狂景)이었다. 눈에 초점 따윈 없는 인형 같은 모습의 사람들에게 번식 행위라 명명된 행위를 하며 맛있다는 소리를 내뱉는 풍경. 그것이 하연이 탐지 때 느꼈던 혐오를 넘어선 혐오의 경지였다. 그와 동시에, 세하의 몸에선 거대한 살기가 갈 곳을 잃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순수한 자신의 감정으로 분노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사형을 선고할 무기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내달렸다.
달리면서 베었다. 달리면서 쓰레기를 베었다. 달리면서 분노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반나체의 남성들이 다 죽고 나서야 겨우 이성에게 한 뼘의 자리를 양보했다. 피웅덩이가 그의 발밑에 고였다. 끈적한 감각이 발목에 질척거렸다.

오라버니!

하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왔다. 과거의 망령에 붙잡혔던  정신이 이제야 현실을 인지하고 바삐 달렸다.

"죄송해요. 제가 도움이 못 되어드려서.... 겨우 과거 따위에 발목이 잡혀서..."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네 과거가 보통 과거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하지... 열받아서 조각도 안 남기고 없애버려서 생체 인식에 쓸 조각이 남아있으려나..."

그 순간, 8층의 구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그 빛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아... 당신입니까. 이 사태를 만든 사람이?

쓰레기통을 엎은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평온한 어조에 세하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연구소장인가?

짧은 물음이었지만 의미는 꽤나 헤비 했다.

맞습니다. 그러는 그쪽은 이세하 씨죠? 만나고 싶었습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대답이 이어졌다.

만나고 싶었다니. 다들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그 이것만,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파격적인 대답에 어울려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빌딩 밖 저 멀리서 쿡쿡 찔러오는 살의가 거슬릴 정도로 위험하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으니까.

"피차 여유는 없으니 짧게 하죠. 메인 컴퓨터의 자료와 모은 실험 데이터를 내놓으시죠."

"그건 곤란하죠. 고객들이 손해를 보시게 되거든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목에 주사를 하고는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몸에서 엄청난 위상력이 쏟아짐과 동시에 몸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부풀어진 근육들과 느껴지는 압박감도 예사롭지 않았다. 

약물로 강화한 건가.

세하의 입에서 귀찮다는 소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 위상 능력자의 힘에, 약물로 인한 능력 강화까지 있었다. 근육에 새겨진 걸 보면 육체개조도 있었다고 추측됐다. 여러모로 귀찮은 상대였다.

"으흐흐.... 이것이 인간의 저력이다. 위상 능력자의 한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존재에 가까워지는 이것이야말로 너 같은 외도(外道)와 다른 인간의 힘이다!"

남자가 손에 위상력을 모으더니 그대로 세하에게 날려버렸다.

아직 안 끝났다!

뒤이어 남자가 세기에도 버거울 만큼의 위상력덩어리들을 날려보냈다. 그것은 차라리 폭격이었다. 대기가 진동할 정도로 날아간 위상력들은 그 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강했다. 상대가 일반적인 위상 능력자라면 승자는 남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서 있는 존재는 이세하였다. 그것이 그의 패배 요인이었다.

불꽃 쇼는 잘 봤습니다. 이제 더 할 재롱은 없으신가요? 

연기 사이로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자색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까 끝났나 보네요. 그럼 제 차례죠? 잘 버텨줘요. 너무 쉽게 끝나면 재미없으니까."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수십 개의 검이 남자의 몸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남자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고통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곧바로 머리 쪽 절단면에서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어나더니 잘린 부분들이 재생되었다.

믿는 수석이 그거였나.

세하가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건블레이드를 불러냈다.

생각보다 귀찮은 구석이 많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상관없었다. 이미 그는 이런 적과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그저, 그는 조금 잘 안 죽는 적일뿐이었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죽이면 된다. 그는 검으로 남자를 휘저으며 생각했다.

한참 뒤, 재생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채 겨우 붙어있는 몸들을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세하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고작 이딴 힘을 얻으려고 이런 짓거리를 했습니까? 당신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몇 개나 사라졌는지 알기나 합니까? 양심의 가책이란 걸 못 느끼는 겁니까, 당신이란 작자는!"

"알 게 뭐야, 그딴 거!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일반인이야! 매일 몇 명씩 없어져도 세상은 알지도 못해! 그런데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느냔 말이다! 난 선택받은 인간이다! 하등 한 인간들과 다른 위대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하등 한 인간들은 나에게 사용된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한단 말이다!"

검이 춤을 췄다. 더 이상 들을 가치조차 없었다. 그의 몸은 서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 하연아. 이 층에 있는 모든 인간들. 우리 쪽으로 보내. 저 고깃덩어리들은 빼고."

세하가 조용히 연구소장의 눈을 집어 들자,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이동시켰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어느새, 8층엔 피웅덩이만 남아 그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왠지 모를 피로감이 그를 감쌌다. 피곤함에 정신을 놓고 드러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는 이 파편을 니케한테 전달해야 했다. 손에 있는 파편을 니케한테 전송하며 그는 전음으로 상황을 알렸다. 곧바로, 작업에 착수한다는 말에, 세하는 피곤에 젖은 몸을 바닥에 앉혔다. 이제 곧 메인 컴퓨터의 자료들이 복사되고, 운이 좋다면, 검은 양 팀의 행방도 밝혀질 것이다. 약간의 변수가 있었지만, 계획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이 불안한 감각은 대체 무엇일까? 세하의 머리에 알 수 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군더더기 없이 수직으로 8층으로 떨어진 무언가는 한참을 먼지 구름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먼지가 걷히자 정체가 드러났다. 그건...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이야, 이세하. 드디어 만났네.

청년이 땅에 꽂힌 거대한 창을 한 손으로 뽑으며 그를 노려봤다. 평소라면 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세하는 피가 얼어붙는 감각에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테인아...

그의 입은 세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컸다. 미스틸테인. 검은 양 팀의 창지기이자 모두를 지키겠다 말하던 소년이 청년이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반가움보단 당혹감이 앞섰다. 이곳을 테인이 안다는 건 그가 이곳과 관련되어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대체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 그는 자신의 목에 창 끝이 겨눠질 때가 되어서야 그 의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테인아! 네가 왜 여기 나타나는 거야! 우리 중에 가장 정의롭던 네가!"

아직도 이상적인 말을 하네, 넌.

테인이 짜증 난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명백한 적의였다.

"그래.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언제나 이상론이었지. 구할 수 없는 걸 구하겠다고 달려들고, 무모한 걸 알면서도 달려들고, 그런 주제에 모두의 앞에 서서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몰아넣었어."

적의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릇에 차 있는 적의들이 당장이라도 그릇을 부수고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말해봐, 이세하. 왜 7년씩이나 우리를 버리고 떠난 거지? 그런 주제에 왜 뻔뻔한 낯짝으로 돌아온 건지 대답해봐!"

테인의 추궁에 세하는 입을 열었다. 유니온에 복수하기 위해 힘을 길렀다고. 그래서 검은 양 팀을 포함해 누명을 쓴 모두를 구하고 싶었다고, 그는 자신이 떠난 이유를 설명했다. 그 말에 테인이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너란 놈은 이상론자야. 그런 주제에 누굴 구해? 웃기지 마. 그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해온 건 나야!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나들을 보호하고 차원종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낸 건 나였다고! 너 같은 이상론자가 아니라 바로 나란 말이야!!!"

창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경악할 만한 공격이 공기를 가르며 터져나갔지만 세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뒤쪽의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건 지금 공격의 위력과 범위를 설명하는 증거이자 잔인한 현실이었다. 동시에, 잔혹한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10년 동안 찾아헤맨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테인은 그 찰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곧이어, 거대한 창이 세하에게 날아들었다. 황급히 검을 불러내 창격을 쳐낸 그였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생각보다 아득히 컸다. 아니, 아픔보단 목표의 소실이라는 충격이 더 컸으리라. 치열하게 이어지는 공방에 하연도 자신의 무기를 꺼내 난입하려 하자 세하가 다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7층을 포함한 연구소 내의 모든 사람들을 구해라.

그것이 하연에게 떨어진 새로운 명령이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모시는 주군이기 이전에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니까. 하지만, 공방에는 틈 따윈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세하와 가장 상성이 최악인 미스틸테인이다. 그렇다면, 그가 명령한 걸 따라야 한다. 그녀는 서둘러 위층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위층으로 가서 실험체들을 구하겠다?

테인이 그를 떼어놓으며 하늘을 향해 창을 찔렀다. 그러나, 그 일격은 어느새 공중에서 나타난 세하의 검격에 막혔다.

어딜 가려고. 네 상대는 나야. 집중해야지!

세하의 검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에 맞춰, 창의 공격도 하늘로 솟구쳤다. 공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의 충돌을 몸으로 체험 중인 하연은 7층을 통째로 이동시키며 6층의 인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빨리 자료를 챙기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메인 컴퓨터는 앞으로 30분은 걸렸다. 하필이면, 상성이 최악인 미스틸테인이 상대라니. 경험이나 뭐로 보나 세하의 우세였지만, 테인에게는 미스틸테인이 있었다. 그것이 승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변수였다. 영지였다면 그 정도의 페널티쯤이야 무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영지가 아니다. 게다가, 세하는 필요 이상으로 힘을 억제한 채 싸우고 있었다. 그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엔 방해물이 너무 많았다. 7층을 끝낸 하연이 재빨리 올라오자, 헤카테와 니케가 그녀와 마주했다.

진척은?

하연의 대답에 앞으로 10분이라고 했다. 그것도 니케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는 덕에 그 정도였다. 그 순간, 바닥이 갈라지더니, 세하가 6층으로 튀어 올라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가쁜 숨이 격렬한 전투를 여실히 드러냈다. 문제는,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달랑 6층까지 밖에 못 날렸나. 예상외로 꽤 하네, 이세하.

테인이 6층으로 따라올라와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그는 아직 여유로웠다. 노릴 수 있는 타깃이 많은 그와 달리 세하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황은 이미 기울어졌어. 이제 죽을 시간이야.

Anllassen, Misteltein(발동, 겨우살이나무). 테인이 시동어를 외우며 창을 들어 올리자 세하가 몸통 박치기를 하며 그를 6층 구석으로 몰았다. 순식간에, 하연 일행과 거리가 벌어졌다. 그래봤자, 몇 초를 번 것뿐이었지만 그는 곧바로 전투를 이어갔다. 창과 검이 얽히며 공방이 거세졌다. 중간중간 메인 컴퓨터 서버가 담긴 기계를 향해 창격이 날았지만 그 창격은 기계에 닿지 못한 채 번번이 검격에 막혀 떨어졌다. 한참 동안의 공방이 이어졌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큰 일격이 두 사람 사이에서 터지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났다.

"이젠 알 때도 됐을 텐데. 너희는 날 못 이겨. 여기서 너희는 죽는 거야."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나라고 비장의 수가 없진 않은데."

"웃기고 있네. 너랑 나는 상성이 최악이지. 내가 겨우살이나무의 힘을 시동한 이상, 너한테는 승산이 없어. 슬비 누나처럼 공간이동이라도 할 줄 알면 모를까."

테인의 비웃음에도 세하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확실히 그는 슬비와 다르다. 공간이동은 그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18살의 이세하 때의 이야기였다.

"반은 맞는 말이야. 난 슬비처럼 다수의 물체와 함께 공간 이동하는 재주는 없어. 하지만 말이야... 지금의 난, 용이야. 내 힘이 깃든 사람이나 물건이라면 나랑 같이 이동할 수 있거든."

세하의 말에 테인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공방 때, 서버 기계에 일일이 손을 대긴 했다. 그게 이것을 위한 포석이었다니! 뒤늦게, 세하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는 메인 컴퓨터에 손을 댄 채 테인을 향해 웃고 있었다.

다음에 보자.

그 말에 그를 포함한 6층의 물건과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테인은 그를 향해 창을 내지르며 외쳤다.

Speer des Hass(증오의 창)

칠흑 같은 빛이 창끝에서 뿜어졌다. 그러나, 그 빛은 사라지는 세하를 제대로 노리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쳇... 빗나갔나.

테인이 짜증 난다는 듯이 창을 털어내고는 그가 사라진 장소를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이세하. 다음번엔 반드시 네 녀석의 숨통을 끊어주마.

한 편, 권능의 힘으로 겨우 이동요새인 유성정원으로 돌아온 세하는 주변의 인물들부터 살폈다. 권능의 힘은 강하지만 제한사항들이 있는 경우가 존재했다. 이번 대규모 이동도 그중 하나였다. 자신의 힘이 깃든 사물이나 생명을 이동시키는 권능은 자신의 힘이 들어있지 않다면 같이 움직일 수도 없고, 자신의 반경 1km 안에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 순간, 세하는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겨우 인식했다. 오른팔을 들어보니 오른팔 피부가 너덜너덜했다. 영지의 힘과 자신의 회복력이라면 지금쯤 회복되고도 남을 상처였지만, 그는 오랜만에 입은 회복되지 않는 상처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겨우살이나무의 저주를 이렇게 쓰다니... 하여간에 응용력은 나보다 좋다니까.

화끈거리는 오른팔에서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겨우살이의 저주. 죽일 수 없는 신을 죽인 겨우살이나무의 저주받은 힘에 그는 혀를 내둘렀다. 영지 밖에서 무방비로 맞았다간 회복도 못할 것이다. 그나마, 몸의 일부가 영지에 닿아있었던 탓에 겨우 치명상은 면하게 천만다행이었다.

"오라버니! 피가...!치유할게요! 가만히 계세요!"

하연이 다급히 그의 팔에 치유를 시작하자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복은 매우 더디었다. 저주가 치유와 맞물려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흉터가 남을 텐데....

하연은 치유를 하며 엘리를 불렀다. 그러나, 달려온 엘리도 하연과 똑같은 말을 했다. 겨우살이의 저주는 겨우살이 본인이 풀거나 그 나뭇가지를 부술 때까지 풀리지 않는 저주 중 하나였으니까.

"흉터가 남을 거야, 마스터. 영지 내라면 모를까, 밖에서는 이런 [상태] 면 [힘]을 풀지 않는 이상, 힘이 제한될 거야."

"얼마만큼 약해질까?"

"80% 정도일 거야. 하지만, 마스터가 억제하고 있는 그 [힘]만 풀어도 그 저주는 사라질 거야. 그건 레플리카의 저주니까. 신화 속 나뭇가지의 저주는 이 정도가 아니야."

당당하게 말하는 엘리의 말에 세하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마스터. 아까 전음으로 나한테 했던 말대로 했어."

전음으로 했던 말이라니. 대체 언제 전음을 보냈단 말인가. 그 의문을 눈치챘는지 세하가 답을 했다.

"네가 8층에서 사람들을 보낼 때, 엘리에게 미리 날려뒀어. 지금부터 실험체들을 보낼 건데, 살릴 수 있는 만큼 살려달라고."

철저한 준비였다. 하지만, 엘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세하의 요구에 제대로 응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올 때부터 늦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시체. 구할 수 있는 건 3분의 1 정도야. 8층의 사람들은 못 구해, 마스터.

엘리가 잔혹한 이야기를 했다. 7층 사람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내 권능으로는 안될까.

세하의 짧은 물음에 엘리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 살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둬. 그렇게 하면 죽어, 마스터.

소용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구하지 못했네... 그 사람들을..."

지켜내보이고 싶었다. 그 사람들마저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의 손이 닿기엔 머나먼 거리였다. 붙잡을 수 있는 건... 3분의 1의 사람들이었다. 뒷맛이 씁쓸했다. 오늘 밤은 또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꿈을 말이다.

그 시각, 플레인 게이트로 들어온 테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미스틸! 조정 받을 시간도 넘긴 주제에, 그 꼴은 또 뭐고?"

보나의 말에 테인이 손사래를 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테인의 꼴은 엉망이었다. 이리저리 묻은 때와 헝클어진 머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너... 설마 또 누군가를 죽이고 온 거야? 그래서 나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는 거야?"

아아... 또 화나게 만들었네...

테인이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힐링 받고 싶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여자친구 앞까지 왔는데, 또 싸우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보나가 진짜 화난 이유는 말없이 돌아다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 진실되게 답해주지 않은 채 속이는 그의 모습 때문이란걸. 그것 때문에 지쳐가는 그녀의 속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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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후, 연구소 습격사건으로 인해 비밀연구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전의 일로 시끄러워졌던 것들이 이번 일과 이어져 더 세게 타올라 유니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유니온도 바보가 아니었다. 세계 유일의 합법적 위상 능력 집단의 권력은 상당하다. 특히나, 이런 불안정한 정국엔 그 효과는 배로 뛰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니온을 욕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유니온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생긴 탓에, 유니온은 꼬리 자르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한 장본인으로는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테인을 지목했다. 기분 나쁜 촌극의 재림이었다. 이 모든 일을 바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구해준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욕을 먹고, 보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기억 속의 어린 소년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의지를 관철하기를 포기한 회색의 어른이 된 자신과 달리, 그 소년은 더럽혀지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작 18살이었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들 모두의 짐을 짊어졌다. 그렇기에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철부지 같은 말이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꺾이지 않던 의지가 있던 그때처럼 세상을 향해, 그의 등을 믿으며 달리고 싶다고 말이다. 그때, 상념을 깨우는 종소리가 들렸다. 손님이었다. 그러나, 제이는 손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 안녕하셨어요,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깨달았다. 운명이라는 소설에는 아직 그가 등장인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소녀에 의해 세상의 운명이 바뀌게 될 것을. 제이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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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시려나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소설을 들고 왔습니다.

살짝 스타일을 바꾸어보았는데 어떤가요?

앞으로는 꾸준히 쓰겠습니다. 전역 10일 남은 말년병장은 이래서 ㅋㅋㅋㅋ
다음 스토리를 기대해주세요 ㅎㅎㅎ

지금까지 firstev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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