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 바위 마을로 돌아가기 전 차원종과의 전투로 헤질대로 해진 옷을 어떻게 해야 한다 생각한 가연은 여우에게 부탁해 마을에서 실과 천 조각을 가지고 와달라 부탁하였다.
“바늘은…… 어떻게 생선 뼈로 대처해야 하나?”
컹-
“아, 가져 와줬구나.”
어느새 심부름을 마친 여우가 실과 천. 그리고 바늘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늘도 가지고 왔구나! 정말 잘했어.”
생각보다 더 잘해준 여우를 품에 안고 마구 쓰다듬어주자, 여우도 좋은 듯한 반응을 보이며 여우의 목에 묶여있는 보따리 속에서 실과 천, 바늘을 꺼내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 소녀를 오싹하게 했다.
“그런데… 누가 이걸 싸준 거지?”
“누구겠어요?”
“히익-!?!!”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가연의 모습에 피식 웃는 은하.
“호위 수고했어요. 생각보다 그간이 억제기란 거 성능이 더러웠나 보네요.”
“아……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럼 언니는 왜 옷을 찢어 먹고 왔을까? 혹시 찢어진 걸 좋아했어요?”
“그, 그런 건 아닌데요…….”
여기저기 그을리고 찢어지고 뚫리거나 녹아내린 듯한 흔적투성이인 옷을 보며 절대 일반적인 정찰 상황에서 생길만한 흔적이 아닌 모습에 은하는 가연이 한차례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죽었다 살아난 건 아니겠지.
“네? 방금 뭐라 하셨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들었을 리가 없을 정도로 속으로 웅얼거리는 수준으로 한 말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데 바느질할 줄은 알아요?”
“아… 뭐, 조금은 할 줄 안다고 봐야겠죠?”
왜 의문형으로 한 질문이 의문형으로 답이 온 걸까 싶지만-
“하- 알았어요. 그럼 빨리 수선하고 돌아와요. 금발이 언니 안 온다고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뭐, 그게 이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납득하게 된다.
“루시가요…?”
“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빨리하고 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돌아서는 은하.
‘근데 저 언니는 어디서 저런 여우를 찾은 거지?’
처음 봤을 때 웬 흰 털 뭉치가 마을 이곳저곳을 헤집고 있는데, 묘하게 다른 사람한테 안 들키려고 최대한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우연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 루시한테 시달려 피하던 도중이기도 해서 여우가 눈치 못 채게 조용히 뒤를 밟았다.
낑- 낑-
‘저건… 아라랑 애들이 모아둔 헌 옷더미잖아.’
킹-!?
헌 옷더미 중 튀어나온 옷감을 입으로 물어 꺼내려고 낑낑거리던 여우를 보며 묘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며 조용히 바라보던 중 겨우 헌 옷 하나를 꺼내자 옷더미가 무너져 여우를 덮쳤고, 그것에 놀라 모습을 드러낸 은하가 옷더미를 막으려고 하였지만-
캥-!
이미 옷더미 속에 파묻힌 여우가 힘겹게 옷더미를 헤쳐 나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고.
…킹?
“아….”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만 은하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여우는 은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키잉~
“음…?”
자신에게 다가와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 내치기가 쉽지 않다.
킹킹-
“…뭘 해달라는 거야?”
킹-
묘하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반응하는 여우를 따라가자.
‘헌 옷에 실. 거기다 바늘까지….’
루시의 시달림에서 벗어나자 웬 여우한테 시달려 의도치 않게 여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바늘이나 실을 대신 꺼내주고, 입으로 물고 갈 수 없어 보따리에다가 싸서 목에 둘러주기까지 한 은하는 설마 여우가 바느질할 리는 없을 테니 누군가가 여우한테 시켰을거라 생각해 뒤를 따라가자.
거기에 있던 건 너무 익숙한 얼굴.
어디서 다치기라도 한 건지 옷이 상해있는 채로 온 가연의 품을 향해 달려드는 여우가 익숙한 듯 애교를 부리고, 가연이 또한 그런 여우에게 잘했다며 여우를 쓰다듬어주는 모습이 마치 전부터 알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신기한 언니라니까.’
*
옷의 수선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가자.
루시한테 걸려 잠깐이었지만 루시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마을을 둘러보자.
아직 진료가 끝나지 않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은 마을 안은 조금 쓸쓸한 감이 들었다.
“한 기남 씨? 왜… 여기에… 혹시 진찰받으러 가시지 않은 건가요?”
“아… 가연 씨. 예, 뭐… 전 괜찮아요. 희망이나, 이 섬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들이 진찰받는 게 먼저니까요. 그리고 전 이미… 이 섬에 뼈를 묻기로 했으니까요.”
아이들이 빠진 황량한 마을 안에서 혼자 고철을 뜯으며 쓸만한 부품을 모으고 있던 한 기남을 발견한 가연은 어째서 아이들과 같이 진찰을 받으러 가지 않았냐 묻자, 한 기남은 자신은 됐다며 자신은 어차피 죽기로 각오했다며 말하였다.
“또 그 말씀이시군요. 죽는 것만이 속죄의 방법은 아니에요. 그러니 아이들과 함께 섬에서 나가세요. 몸을 치료하고, 죽는 것 외에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는 게… 오히려 아이들은 그걸 더 바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가연 씨야말로, 섬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네, 아직 섬에 계신 분들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셨으니까요.”
아직 섬 안의 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가지 못했기에 나갈 수 없다 말하였다.
그런 소녀의 말에서 이유 모를 집착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한 기남은 자신이 잘못 느꼈을 거라며 넘어갔다.
“가연 씨는…… 만약 그 교단에서 가연 씨를 잡으려고 한다면… 그나마 이 섬 안에 있는 게 안전하다면… 밖으로 나갈 각오를 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잠깐 아무런 말도 없던 한 기남이 꺼낸 질문에 연은 당혹스러움도 잠시 예매한 답을 내렸다.
어쩌면 소녀가 갇혀있던 교단에서 소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자신과 같이 누군가에게 평생을 쫓기는 처지일 수도 있는 가연에게 지금이 그나마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이 섬을 등지고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바깥으로 나가도 되는 걸까.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질문에 가연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설사 쫓긴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섬을 나갈 거예요.”
“어째서죠. 왜 굳이 위험을 알면서도 가려는 건가요?”
“현재에만 안주하다간 중요한 걸 놓치게 되거든요.”
설사 거짓된 안전과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새장 속에 갇힌 새는 날아오를 수 없다.
이미 오랜 시간을 새장 속의 실험체로 살아온 소녀가 놓친 중요한 것-
“그리고 전… 그걸 오랫동안 놓쳤었으니까요.”
새장 속에 갇힌 새는 더 이상 푸르른 창공의 내일을 꿈꿀 수 없다.
새장을 나와야 비로소 되찾을 수 있는 창공.
그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
“……그렇군요. 역시 가연 씨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분이셨군요.”
“네? 저… 그렇게 안 강한데요. 위상력을 각성한 것도 고작 며칠밖에 안 된 햇병아린데….”
“아니요. 가연 씨는 강한 분이십니다. 저 같은 게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가연은 한 기남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계속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고.
그런 가연을 보고 정말 뭘 하든 표가 나시는 분이라는 생각과 함께-
“왜 루시 양이 엄마 같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예? 아니… 그 엄마 같다는 말은 좀…… 아직 제 나이도 그 정도가 아닌데….”
“아… 실제로 엄마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뭔가 마음의 한편을 편하게 해주시는 게 어머니와 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 그런 소녀여서 소녀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위로받을 수 있었다.
자신을 용서한 루시와 자신에게 희망을 심어준 은하.
그런 두 사람처럼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후회와 죄책감으로 가득했던 자신에게 죄를 외면하지 않고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섬의 아이들에게 속죄하려 노력한 자신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 말해준 가연.
스스로가 비겁한 겁쟁이라 생각하고 있던 한 기남에게 가연이 해준 말은 하나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런 소녀의 위로를 받은 뒤에 오는 건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소녀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속죄의 방법.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자신이라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해준.
자신이 현재에 안주하고 내일을 바라** 않으려 할 때,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 고마운 은인을, 어리석고 비겁한 겁쟁이였던 자신에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 말해준 이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다.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안 묻었습니다.”
“?”
혹시 진짜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열심히 천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연을 보며 예전에 자신의 손님들이 떠오르던 순간.
“하윽……?!”
갑자기 들리는 새된 비명.
같이 있던 한 기남과 가연은 서둘러 비교적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를 쫓아가자.
거기엔 어딘가 안 좋은지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루시가 있었다.
“루시야!”
“연이… 언니…?”
한 기남보다 먼저 루시에게 다가간 가연이 비틀거리는 루시를 잡자.
힘겹게 답하는 루시를 보곤 한 기남이 우선은 저기 침대에 눕히라는 말을 하자.
“괘… 괜찮아요… 그냥 목이 좀…….”
“목이요. 그럼 제가 물을 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걸로는 안 돼…… 필요한 건, 물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던 가연의 손을 뿌리치곤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루시.
“그런 몸으로 어딜 가려고! 일단은 누워서 쉬고 있어.”
“여, 연이… 언니…….”
순간 가연을 바라보는 루시의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욕망이 감돌았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갈증을 채우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 그런 욕망을 달래 줄 극상의 향을 풍기는 미주(美酒)를 발견한 것처럼 당장이라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셔버리고 싶은 욕망이 몸을 지배해 한순간 총명했던 눈동자는 빛을 잃고 가연을 탐하려 입을 벌리려는 순간.
“뭐야, 금발? 괜찮은 거야?!”
“!? 으, 은하 씨……”
다행히 루시의 새된 비명을 듣고 루시를 찾고 있던 은하의 목소리가 수면으로 잠들었던 루시의 정신을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렸다.
“내가… 내가 대체…… 가연 언니한테 무슨 짓을……. 내가 마물이 아닌… 가연 언니를……!!”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자신이 방금 뭘 하려 했는지를 떠올린 탓에 심한 충격을 받은 루시가 황급히 가연에게서 떨어져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 말은 전부 가연에 귀에 닿았다.
“루시야.”
루시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을 하려 했기에 저렇게 충격을 받은 걸까.
“휘청대면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어쩔 수 없네, 부축해 줄 테니 이리 와. 언니도 좀 도와줘요.”
그런 의문이 생길 때 휘청이는 루시를 부축하려고 다가오는 은하의 지원 요청에 같이 루시에게 가자.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뭐……?”
두 사람이 뻗은 손을 쳐내며 오히려 멀어지는 루시의 모습에 놀라자.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자리를 피하려 한다.
“죄송해요. 하지만… 가까이 오면…… 안 돼요. 지금의 저한텐……!”
<위잉!><위잉!><위잉!>
“하, 하필이면 이런 때에 탐지기에 반응이……!”
“아이들이 진찰을 받으러 간 길목에… 위상능력자 반응이 잡혔습니다!”
“저쪽 그룹에도 위상능력자가 두 명 있다곤 하지만… 지금쯤 아이들과 같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탐지기에 포착된 건…”
이 섬의 여섯 명째 위상능력자인 섬의 관리자.
그의 반응이 잡혔다는 말에 루시의 얼굴에 조급함이 비쳤다.
“가야 해…… 막지 않으면……!”
“그 몸으로 어딜 가는 거야! 기다려!”
“……그 얘긴 대체 뭐였을까.”
루시가 나한테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럼 대체 그게 뭐길래 저렇게 충격을 받은 걸까.
떠오르는 의문을 잠시 가라앉히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마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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