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놀람과 당혹감이 감도는 그들의 얼굴에 가연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입으로 자신이 인체 실험의 실험체였다는 걸 밝히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럼 금발의 정체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아… 그건 우연이 들었어요. 제 방 앞을 지키던 사람이 나누던 대화에서 그… 섬의 관리자가 했던 말이 있었거든요.”
우연.
정말 소녀가 루시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진짜 우연이였다.
죽기 직전까지 실험당하다 겨우 목숨만 붙어있던 상태로 방에 눕혀진 소녀가 겨우 의식을 되찾은 순간 듣게 된 문 앞을 지키던 사람들이 나누던 대화 속 내용인 4천 년을 산 위상능력자와 그 분신. 그리고 그 분신을 처리하고 분신이 지키던 본체를 가져올 거라며 집행부대라 불리는 곳의 도사를 보낸다는 말.
당시에는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오늘 만난 섬의 관리자가 한 말이 계기가 되어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흠…… 그럼 섬의 관리자. 그 사람이랑은 무슨 관계에요?”
“……예?”
은하가 내건 질문에 얼이 빠진 듯한 대답을 하였지만,
빡-
공포를 이겨내려고 쥐고 있던 손에서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처음 본 것 치고는 반응이 격렬하던 데… 초면 아니죠.”
“…….”
“으, 은하 씨! 일단 지금은 좀 멈추고… 연이 언니. 손, 손 좀 놔보세요. 방금 부러지는 소리가….”
그런 가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은하와 말리려는 루시.
“…양아버지.”
“……뭐라고요?”
순간 가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가연의 손을 풀려 안간힘을 쓰던 루시조차 멈칫하였다.
“양아버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양아버지랑 닮은 사람이었네요….”
‘그저 닮은 사람을 만난 것 치곤 반응이 너무 심했는데….’
그녀의 양 아버지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자가 그저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유만으로 공황과 과호흡을 일으킬 정도로 가연에게 상상 이상의 트라우마를 새겨놓은 것을 보면 그녀가 인체 실험의 실험체가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꾸 손목을 강하게 쥐어서 손목이 부러지다 못해 끊어질 것 같았다.
“후우- 언니도 인생이 참 개 같이 꼬였네요.”
수금원 일을 하면서 나이에 맞지 않게 별별 사람을 봐온 은하였지만 자신 또래의 아이가 인체 실험을 당하던 실험체였던 경우는, 은하로서도 처음이었다.
“제가 한 말을 믿으… 세요…?”
“……그 끊어버릴 것 같은 손목부터 놓고 말해요.”
너덜거리는 손목을 그제야 인식한 가연은 이제야 통증이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고통에 인상이 구겨졌다.
뚜득- 으드득-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덜거리던 손목이 소녀가 손을 놓자마자 부서졌던 뼈는 다시 제 위치를 찾아 들어가고, 찢기고 터진 근육과 피부. 그리고 혈관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죄송해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그렇게 말하며 막 회복된 손목을 가리는 가연에게 은하가 다가간다.
“못 볼 꼴 아니에요. 그러니… 이런 일로 사과하지 말아요.”
그러고선 익숙한 듯 가연의 손바닥과 손목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면서.
“그래도 애들이 있는 곳에선 이런 건 적당히 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겠네요.”
가연의 귓가로 바싹 다가간 은하가 작게 속삭이자, 무슨 말인지 알았다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아! 셋 다! 여기 있었구나! 이리 와! 내가 우유 줄게!”
*
“다들 목 마르지? 여기 우유 있어.”
활짝 웃으며 우유 3잔을 챙겨온 아라의 등장에 가연은 아직 덜 딱인 손목을 자연스레 등 뒤로 숨기고는 아라와 시선을 맞추려고 몸을 숙인다.
“우리 아라 기특하네. 마침 목이 말랐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챙겨왔을까?”
“예헤헤.”
살며시 미소 지으며 아라를 칭찬해 시선을 돌린 사이 등 뒤로 숨겼던 손목의 피를 다 닦아낸 가연은 아라 혼자서 들고 온 세잔의 우유를 받아 들고선 하나는 아라가 우유를 가져와 준 것에 기뻐하는 루시한테 또 하나는 표정과 말투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심 고마워하는 은하에게 건넸다.
“됐어요. 나는 우유가 안 맞는 체질이라.”
“그럼 제가 마셔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해.”
은하가 사양하자 루시가 잽싸게 은하의 우유를 마셔도 되냐 묻고, 꿀꺽꿀꺽 정말 보기 좋게 마시는데.
“연이 언니, 언니는 안 마셔?”
“응? 아. 아니 마시긴 할 건데….”
파하~
기분 좋게 우유를 마시는 루시의 모습을 보곤 가연은 자신이 들고 있던 우유를 아라에게 건넨다.
“어… 이건 연이 언니 마시라고…”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기까지 혼자 우리를 위해 우유를 가져와 준 아라한테 언니가 답례하고 싶어서 그래.”
아무리 의젓하게 행동하려고 해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그런 아이가 자신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참고 남한테 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더군다나 여긴 그렇게 다양한 식자재를 쉽게 구할 수도 없는 곳인데.
“그래도…”
“음… 그럼 언니 혼자서 마시기엔 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언니가 마시고 남는 건 아라가 대신 마시는 건 어때?”
머뭇거리는 아라에게 상냥한 어투와 미소를 띤 얼굴로 제안하자.
아라 또한 그러면 되겠다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그녀가 한입 마시고 남은 우유를 아라한테 건네고 조금 있어 은하가 가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의 마시지도 않았네요.”
“으음… 마, 마시긴 했어요.”
은하의 말에 바로 당황하며 또 유치원 수준의 괴멸적인 거짓말을 펼쳤고.
“뭐, 입술만 조금 적신 수준으로 마신 것도 마셨다면 마신 거겠네요.”
“으으… 여, 역시… 보고 계셨네요”
속아주기도 힘든 거짓말에 본 그대로 말하자 시선이 느껴졌다며 답하는 가연.
“왜 그런 거예요? 언니도 목은 마를 거 아니에요.”
“음… 그게 이상하게 갈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랄까, 솔직히 말하면 갈증만이 아니라 공복감도 전혀 없어서요.”
“…….”
가연이 멋쩍은 듯 한쪽 볼을 손으로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자.
은하는 그럴 리 없다며 또다시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렇게 빠른 재생을 일으켰는데, 몸에서 열량과 수분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신체 재생 그 자체가 위상력이 동반된 것이라 해도 인체에서 가장 복잡한 뇌를 완전히 재생시키고, 조금 전 같이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자해행위에도 순식간에 원상대로 복구가 됐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가 열량을 필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피를 쏟은 것도 있으니… 적어도 갈증은 느낄 텐데.’
같이 행동하는 동안 그녀가 흘린 피 만해도 아까 우유가 담겨있던 컵 전부를 채우고도 남는 양이다.
그 정도로 체액이 빠져나가면 보통은 갈증이 느껴져야 할 텐데.
갈증은커녕 공복감조차 없다며 아예 마시지도 않은 우유를 아라에게 건네주고, 아라한테 잘 마셨냐며 태연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가연을 보며 무슨 실험의 부작용 같은 걸로 갈증이나 공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면 됐어요. 어차피 한가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니.”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희망 씨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한번 보러 가볼까요?”
“뭐, 그래요.”
“자,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출발하려는 두 사람에게 자기를 잊고 가지 말라는 듯 헐레벌떡 따라오는 루시.
“아… 여러분, 무슨 일인가요.”
비둘기의 앞에 선 세 사람이 희망에게 연락을 걸자.
처음 보았을 때처럼 괜찮아 보이는 희망의 모습에 세 사람은 속으로 안심하며 각자 희망에게 말을 건냈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좀 괜찮아졌나요?”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괜찮으세요? 혹시 안 좋으신 거면-”
희망이 발작했을 때 가연 역시 과호흡으로 힘들어했기에 희망이 아팠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했었다.
“하, 한결 좋아졌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가연 씨도 많이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으신가요?”
“아, 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흐음- 두 사람. 순식간에 우리 둘은 잊고 둘만 화기애애한 게 생각했던 것보다 친밀한 사이였나 보네요.”
“아앗. 은하 씨! 한참 보기 좋았는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서로의 몸 상태를 걱정해 주며 비교적 사업적인 은하와 루시와는 다르게 뭔가 사적인 느낌이 드는 둘의 대화에 장난기가 돈 은하가 입을 열자, 드라마에서 딱 재밌어지려는 장면에서 갑자기 채널을 돌려버린 것에 화난 주부처럼 화를 내는 루시.
그리고 은하의 말에 갑자기 어색해진 두 사람.
“어흠- 그, 그러고 보니 여러분은 섬의 관리자와 만나 보셨나요?”
“급하게 말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뭐- 결과만 말하면 봤어요.”
갑자기 말을 바꾼 희망의 행동에 은하가 이죽거리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자.
“네. 그자가 저를 습격했던 자였어요. 그리고 은하 씨가 찾던 빚을 진 사람이기도 하고요.”
루시가 부연 설명을 하면서 가연과 그 남자가 엮인 것에 대해서는 일단 함구하기로 하였다.
“나한텐, 빚은 조만간 갚을 거니까. 자기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는 다시금 저를 제거하려고 덤벼들었어요.”
순간 루시가 건낸 말에 희망이 상당히 당황하였다.
“덤벼들었다니… 그럼 설마 관리자도 여러분처럼 특별한 힘이 있는 건가요?”
한순간 희망의 시선이 가연에게 향했지만 외상하나 없이 말끔한 소녀의 모습에 희망은 안심한 듯 다시금 침착하게 말을 이었고, 희망에 물음엔 루시가 세 사람을 대표해 답하였다.
“네, 저나 은하 씨, 연이 언니 같은 위상능력자였어요.”
“이런…, 이러면… 일이 힘들어지는데. …최악의 경우, 여러분의 힘으로 관리자를 막으려고 했는데…”
루시의 대답에 희망은 계획이 틀어졌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뇌하였다.
“예? 저…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혹시나 자신만 못 들었나 싶어 은하와 루시를 쳐다**만, 두 사람도 들은 적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물론 그런 계획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한다고 해도… 당신한테는…”
“네? 뭐라고 하셨어요. 음질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다시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아주 작게 웅얼거리는 희망의 말에 귀가 밝은 가연조차 비둘기의 좋지 않은 음질에 무슨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려고 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연의 말에 황급히 말을 정정하고, 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숨을 고르곤-
“어쨌든 상대가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함부로 도발하거나 자극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상대가 세 사람과 같은 위상력을 소유한 자. 그리고 이런 섬을 관리할 정도라면 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전투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라고 해도 만난 지 얼마 안 돼 손발이 잘 맞지 않을 세 사람이 상대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희망은-
“그러지 마시고 제가 저번에 말한 것처럼, 한기남 씨와 함께 섬을 나가세요. 그래서 이 섬의 실태를 바깥에 알려주세요. 부탁… 드릴게요.”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할 길을 선택했다.
“……미안해요. 희망 씨의 부탁…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희망의 선택한 그 길은 자신들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할지도 모르는 길이었지만, 그 길은 이 섬에 있는 다른 이들의 구원을 포기하는 길이었다.
“네? 어째서죠? 설마 제 부탁이 귀찮아서 그런 거라면…”
“그런 게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희망 씨의 말대로 그냥 이대로 떠나고 싶기도 해요.”
“그럼 왜-!?”
“하지만, 그렇게 하면 희망 씨와 이곳의 아이들은 어떡해요.”
옅은 미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미소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찬란해 보이는 소녀의 미소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한결같이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그 모습에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한테도 섬의 관리자를 쓰러뜨려야 할 이유가 있어요.”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옆에 서 있는 루시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는 가연.
“첫 번째는 저들한테 빼앗긴 루시의 본체를 되찾기 위해서, 두 번째는 은하 씨가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제가 희망 씨한테 받아야 할 보수를 위해서예요.”
사실은 저 세 가지 이외 자신이 갇혀있던 교단과 관련된 인원인 것 같아.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처음 본 순간에 자신이 또 죽었었기에 그것과 관련된 말조차 희망의 앞에서는 꺼낼 수 없었다.
싱긋 미소 짓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처음 소녀와 나누었던 보수를 떠올렸다.
“잊지 않으셨죠, 희망 씨? 건강해지면 저랑 같이 산책하기로 했잖아요?”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당신도 제 몸 상태를 아시잖아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예전 둘이 처음으로 만났던 순간에 나누었던 약속을 꺼낸 소녀.
하지만, 희망은 그 약속이 정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냐며, 자신이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냐며 외쳤다.
“저는… 이미 늦었어요. 이 섬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로 결심했다고요.”
to be conti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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