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평문(세계평화의 문) 스토리 언급 有
※ 캐릭터들 임의 설정 有
그러고 보니 루시는 달콤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보통 단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한다면 되게 디저트를 생각하니 디저트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디저트가 전부 단 맛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굳이 정정하자고 하면 ‘단 맛이 나는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
프랑스의 빵집에서 몇 년 보고 배우고 직접 만들어본 탓이 클까. 루시는 다른 음식에 관해서는 대략적으로 평범한 평을 내리는 반면, 디저트와 관련되어선 굉장히 사람이 까다롭게 변하였다. 자신의 부모님이 만든 빵과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라다 보면 당연히 자신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지론을 세우지만…….
-꼬마 아가씨, 꼬마 아가씨는 이미 다 큰 거 아니야?
은하의 이러한 신랄한 지적을 들을 때마다 루시는 대충 그런 거라고 넘어가주시라고요! 라며 자신의 제4의 벽은 깨지 말아주세요, 같은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이상한 스탠스를 취했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미래와 철수는 루시가 이럴 때마다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고, 애리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은하만이 루시에게 아주 가끔씩 이런 식의 태클을 걸 뿐이었다. 뭐, 그렇다고 은하도 시시때때로 루시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루시의 사정을 같은 시궁쥐 팀인 은하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 뭔가 말의 앞뒤에 어폐가 있다 싶으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툭하고 나오는 그런 종류의.
아무튼 루시에게 있어서 ‘프랑스에 위치한 빵집을 운영하는 부부의, 장래희망은 아마도 빵집 사장님이 되는 것이 꿈인 딸’이라고 하는 정체성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건 시궁쥐 팀의 모두는 아주 잘 알았고, 같은 신서울지부 소속의 타 클로저 팀원들 – 검은양, 늑대개, 사냥터지기 – 은 대략적으로 눈치는 까고 있었다.
그렇다고 루시가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완연하게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만큼 ‘본체’는 루시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정체성이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체는 루시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자체, 계기였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의 빵집 소녀 루시를 만든 숨겨진 공신이기도 했다.
-정말 친절한 분들이에요.
헤카톤케일을 물리치고 파리에서 빵집을 하던 플라티니 부부에게 거두어진지 며칠 째. 루시는 부부의 눈을 피해 다락방에 숨겨둔 관에 있는 본체에게 말을 걸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본체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이유는 부부가 루시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케이크를 좋아하냐는 둥,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는냐는 둥의 루시의 편의를 – 루시 기준으로는 – 지나칠 정도로 봐주다보니, 본체와 함께 앞으로의 동향을 어떻게 할지 의논을 나누지도 못할 정도였다. 텔레파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루시는 어째서인지 이건 본체 – 물론 본체는 저주로 인해 밖으로 나오지 못해 관을 마주보면서 이야기해야 하지만 – 의 앞에서 상의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과한 친절을 받아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요.
그것이 지나치다는 둥, 과하다는 둥으로 말은 하지만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건 신기할 정도로 루시도 아주 잘 알았다. 다만 이런 친절을 루시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았다. 사실 루시에게 있어서 한 번도 이런 친절은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행동들이 사람의 선한 호의라는 것을 자의로 깨달은 게 도리어 대견할 정도였다. 그래서 루시는 왕녀의 기억과 지식을 공유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안 그랬으면 자신은 제어하지 못하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왕녀가 루시와 똑같지만 훨씬 더 차분하고 관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루시에게 물었다.
-나의 친구,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의 친구.
본체인 그녀가 분신인 루시를 지칭하는 호칭은 상당히 친근하였고 그 사이의 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는 왕녀가 자신을 부르는 그 호칭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애초에 본체를 대신할 ‘소모품’으로 창조되었을 뿐인데 이런 분수에 넘치는 말을 왕녀에게 들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녀의 말에 반론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왕녀는 루시가 태어나게 된 이유, 목적 그 자체였다. 한쪽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서 ‘친구’라는 관계가 성립되는 건 가능한 것일까요? 루시는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해봐야겠다는 다짐만 해댔다.
루시는 본체에게 아주 당연한 경외를 표하고, 본체는 자신의 분신일 뿐인 루시에게 상당히 예를 갖춘다.
-전 왕녀님을 대신할 뿐인 존재인 걸요. 왕녀님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일이었을 텐데, 전 서투르기 그지없다고요.
사실이었다. 사악한 용도 아니고, 사악한 용의 자제 따위에 그렇게 애를 먹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루시가 아는 사악한 용을 쓰러뜨린 왕녀라고 한다면.
그에 비해 왕녀의 힘을 빌려 쓰는 자신은 왕녀의 기억을 토대로 서투르게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인지 루시 본래의 힘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헤카톤케일을 향해 커다란 한방을 먹일 때 머리로는 익숙한 감각이지만, 몸으로는 낯선 경험을 하는 듯한 기시감도 느꼈다. 그 기시감을 계속해서 신경 쓰느라 결국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끌고 위상력도 상당히 소모하였다. 힘을 빌려 쓰는 것뿐인데 그렇게 애를 먹어서는…….
루시의 자책에 왕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폄했다.
-전 친구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악한 용을 쓰러뜨렸잖아요?
오히려 그 달관한 목소리를 참을 수 없는 건 본체가 아닌 분신인 루시 쪽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왕녀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그러면 저도 한 가지 물어볼게요. 친구는 왜 저를 왕녀라고 부르시는 거죠?
-그야……. 왕녀님이시잖아요?
-하지만 그 왕국은 얼마 못가 멸망하고 말았잖아요.
다 제가 미숙했기 때문이죠. 이 뒷말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지만, 왕녀와 기억 및 경험이 거의 다 일치하는 루시는 눈치 빠르게 그 뒷말을 바로 알아챘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요! 왕녀님은……!
이렇게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즉각 부정부터 하지 않았을 테니까. 왕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때요? 친구가 보기에도 저도 잘날 것 없는 인생이지 않나요?
-왕녀님…….
-그리고 왕녀라고 하는 표현은 지금 시대에는 상당히 착오적인 말이 분명하잖아요? 무려 몇 천 년 전의 칭호인데, 그걸 가지고 계속해서 위신을 떨치는 것도 조금…….
-그래도…….
-그래서 말인데, ‘루시’라는 이름은 친구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그런가요? 전 저보다는 왕녀님한테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은데…….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왕녀는 루시가 플라티니 부부에게 받은 이름을 언급하자, 바로 루시는 부끄러워졌다. 루시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부부와 대화할 때 텔레파시로 들었다는 소리인데, 바로 왕녀가 그 때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건 아마 루시에게 직접 칭찬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루시는 루시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또 투덜거렸다.
-저한테 너무 과분한 이름이지 않나요? 별똥별 같은 것을 따라간 끝에 만난 게 저라면서, 빛(Lux) 같다느니 뭐니 하는…….
-왜요, 잘 어울리기만 하는 걸요.
-……사실 이 이름과 함께 한 가지 부탁을 받았어요.
-부부의 딸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요?
-사실 부탁도 아니었어요. 제안이었어요. 내키지 않으면 그냥 떠나가도 좋다고…….
부부는 자신들의 루시를 향한 호의는 루시가 헤카톤케일로부터 서유럽 전선을 지켜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은 루시에게 강요할 것은 없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마음에 들었으면 계속 지내도 된다고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헤카톤케일 이 세계 어딘가에 뿌린 알의 부화 이후의 순간도 왕녀의 몫을 대신하는 루시의 몫이었다. 한마디로 좋은 은신처가 생긴다는 의미인데,
……이 좋은 걸 두고도 루시는 왜 이리 고민인지 모른다. 이 정도라면 혼자서 결정해도 될 몫이라고 보는데, 굳이 본체인 왕녀에게 찾아와서 하소연한다는 건…….
-하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리나요?
-네, 많은 것들이요.
-부부가 친구에게 보이는 호의가 사실은 다 저에게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
-나는 저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가짜’에 지나지 않는데……. 라는 생각이라도 드나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나요?
-왜인지 그럴 것만 같았어요.
왕녀가 소리 내어 – 물론 그 웃음소리는 오로지 루시만이 텔레파시로 들었다 - 웃었다.
-제가 이래 뵈도 제법 오래 살았어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회에서 나름 성인식까지는 치룬 어른이라고요?
-그건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씩은 재밌어요. 친구에게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를 알려주고 이해시키는 행동이.
오래도록 이 세계를 관측한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복사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은 단순히 ‘지식’ 선에서 그치지 않으니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다.
-친구의 마음대로 하세요. 전 친구의 결정을 따를 테니까요.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계속해서 사명감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긴 세월을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니까요.
-혹시 왕녀님 본인 이야기인가요?
-나의 친구, 그런 건 눈치 챘어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게 좋다고요?
참고로 본체와 루시는 다른 점이 있었다. 몇 달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실제로 살아왔다. 살아왔다는 건 본인 특유의 습관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
그런 의미에서 초창기의 루시는 많이 고집스러웠다.
-하지만 그러면 불공평할 수밖에 없어요.
-어째서죠?
-저만 누려야 한다는 건…….
-저는 만족해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엇보다도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친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바로 나의 것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기억일 뿐이잖아요.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하잖아요. 예를 들면, 처음 플라티니 부부에게 거두어졌을 때, 부부가 루시에게 주었던 마시멜로가 들어간 핫초코의 달달한 맛 같은 거라든지…….
잠깐, 이라며 왕녀가 루시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왕녀는 엄청난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내심 놀란 기색이었다.
-친구도 단 것을 좋아하는군요.
-지금 논점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게 친구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네요. 여기에 있을 계기가 되었다는 거고요.
-……!
사실 루시가 이렇게 유독 고집스럽게 굴었던 이유는 그거였다. 처음 맛 본 초콜릿과 마시멜로의 맛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부드럽게 움직였기 때문. 그래서 그걸 자각하자 루시가 가장 먼저 맛 본 건 텁텁한 죄악감이었다.
여기에 더 머물면 안 되었다. 그럼 자신과 달리 오로지 사악한 용과 그 후예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본체에게 대단한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닌지. 왕녀가 살았던 시대와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해요.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루시에게 왕녀는 간단히 결정을 내렸다.
-제가 빵집 딸인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하죠.
-왕녀님…….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친구?
-하지만…….
-보상해주고 싶었어요.
-……보상이라니요?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오늘 여러 가지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루시와 달리 루시의 본체는 고요하고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초라한 나와 친구가 되어준 당신에게요.
-…….
-하지만 지금의 전 자유롭지 못한 몸. 그래서 부부에게 호의에 감사했고, 그 호의가 친구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저는 그 누구보다도 기뻤어요.
-…….
-그러니 괜히 미안해하지 마세요. 친구에게도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가족애, 같은 거요.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을 찾을 수가 없을 거 같아요. 제 안의 가족들은 이미 굳혀져 있고, 살아있지도 않으니까요.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 찰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순간들, 가족들이랑 같이 보냈던 시간들은 너무도 값진 추억이에요.
-그 추억으로 인해 제가 지금까지 버틸 수도 있었던 거죠.
-…….
-사실 나는 친구의 친구가 아닌,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리더라고요. 나는 제약이 많은 반면, 친구는 자유로우니까요.
-그건 왕녀님이 아니라 사악한 용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결론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요. 그걸 탓하는 게 아니에요. 본디 제가 해야 했던 의무를 단지 당신에게 떠맡긴 것 뿐, 그 이상으로 더 탓할 게 무엇이 있을까요.
루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이것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정보를 받아드리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왕녀에게 루시의 완고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에……. 왕녀님을 옥죄고 있는 사악한 용의 저주가 풀리면 그 때에는, 이번에는 제가 왕녀님에게 이 세상을 구경시켜드릴게요.
-그거 멋진 이야기네요. 그러면 미리 가명 같은 거라도 지어야 할까 봐요. 어떤 사람이 와서 이름이라도 물어봤는데, 왕녀라고 대답하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이렇게 루시의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지만 왕녀의 속은 상당히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해줘서 고마워요, 친구. 하지만 그건 아주 먼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이 저주가 언젠가 풀리는 그런 종류의 저주였다면, 내가 내 손으로 내가 살던 고향을 멸망시키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도 그 정도의 자각은 하고 있답니다.
……이건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 할 이야기일 터. 유일한 친구라고 한다면 더욱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그런 종류의 비밀.
-아, 그리고 참고로 하나 더.
-네, 무엇이죠?
-왕녀님을 왕녀님이라고 부르는 건 제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는 거예요.
-네……?
루시에게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왕녀는 처음으로 당황의 제스처가 취해졌다.
-아무리 왕녀님이 왕녀님을 폄하한다고 하더라도, 저에게 있어서 왕녀님은 경의를 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친구…….
-그러니까 너무 왕녀님도 왕녀님 자신을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친구 쪽도 마찬가지에요.
왕녀의 목소리는 항상 듣기 좋은 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본체와 분신의 관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타고난 특출난 카리스마인걸까.
-친구가 나와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에요. 내가 당연하게 하는 일을 친구가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너무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그리고 저도 처음은 많이 서툴렀다고 했잖아요. 이 세상에 당연하게 나의 힘이 아닌 것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다루는 경우는 없어요.
-……잘 알겠어요. 그럼 서로 약속한 거예요?
-네, 우리 약속하도록 해요.
그렇게 그 날 부로 고대 왕녀의 분신은, ‘루시 플라티니’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바깥에서 본 것과 빵집에서 바쁘지만 재밌는 나날들을 루시는 매일 밤 다락방에 올라가서 왕녀에게 조잘조잘 풀어냈다. 그런 나날들이 10년쯤 지나자 당연하게도 루시의 말솜씨는 무르익어갔다.
그 때 왕녀 몰래 루시 스스로 다짐한 약속이 또 있다는 건 왕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약속은 자신을 그저 분신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유일한 친구’로 삼아준 왕녀에게 바치는 경외와도 같은 것.
하지만 이제 그 약속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온몸에 독기를 내뿜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왕녀를 보는 순간, 루시는 자신이 먼저 지키지 못한 ‘약속’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자신은 결국 가장 필요할 때, 왕녀의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러니 같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디저트를 나눠먹는 그런 미래 따위는 이제 꿈속에서라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왕녀는, 그녀의 친구는 과연 그런 그녀를 원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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