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무것도 몰라.”
차가운 목소리가 내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아담한 체구의 소녀는 두 손을 심장 앞에 모아 쥐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야, 야. 그러다가 찌르겠다. 평소라면 그따위 농담이라도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으득, 하고 소녀가 이를 갈았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청금석의 원석처럼 맑은 하늘빛 눈동자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타올랐다. 이슬비, 나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그 감정을 처음 보았다.
아니, 보고 있었으나 애써 무시했던, 그랬던 것이.
“아무것도.”
나를 몰아갔다. 단언하는 그녀의 어조에 나는 아무것도 반박하지 못했다.
*
이슬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단지 멍하니 앉아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오늘 오후에 보았던 이슬비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빛,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감정보다도 싸늘했고, 지독했다.
대체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의문이 나를 물고 늘어졌다. 어두운 밤, 구로역의 편의점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민에 빠진 나에게 무엇인가 날아왔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상황을 파악했고, 내 손이 그 미지의 물체를 붙잡고자 움직였다.
이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기분 좋은 중량감이 느껴졌다. 음료수였다.
“이세하, 옆에 앉아도 될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시선은 그 목소리의 발원지로 향했다. 굴곡진 몸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 특유의 쾌활한 몸짓. 팀 ‘검은 양’의 일원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 중 하나인 서유리였다.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멋대로 내 옆에 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헤헤, 하고 해맑은 목소리로 내 시선을 웃어넘겼다.
“……서유리.”
내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서유리는 내 옆에서 조용히 캔을 땄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유리는 그대로 탄산이 빠지지 않은 음료를 들이키더니,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캔을 떼어냈다.
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훑어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그냥. 천하의 이세하가 게임을 안 하고 있다니. 별일이구나, 싶어서.”
나는 그녀를 따라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으응? 하고 서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이건 그런 거지. 던전을 하루 종일 달리다가 세이브 포인트에서 잠시 HP와 MP를 관리하는 도중?”
아아, 하고 서유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시대를 앞서가는 비유는 여전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서유리는 아닌 것처럼 굴어도 얼굴에 모두 티가 났다. 여러모로 이슬비와는 정반대인 여자였다. …가슴이라든지.
나는 이대로 대화를 끊을 수도 없었기에,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렇다고 치고, 너는 무슨 일이야? 천하의 서유리가 음료수를 다 사주고.”
나는 그러면서 캔을 따려다가, 조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서유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마시고 나서 돈 내라고 하는 건 아니지?”
“……너, 그거 실례라는 건 알지?”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내 눈앞에 악마가 나타났다. 빙긋, 웃는 서유리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캔을 땄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제야 악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얼거림도 함께였다.
“나도 음료수 정도는 사줄 줄 안다고.”
그러면서 그녀는 엣헴, 하고 어깨를 펼쳤다. 어느 부분이 특히 강조되었다.
“……편의점 도시락까지는 조금 무리겠지만.”
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서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지간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말은 그래도 무언가 용건이 있으니까 사준 거 아니야, 음료수.”
나는 그러면서 흘깃, 서유리를 바라보았다. 탄산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알싸한 감각을 선사했다. 나는 눈짓으로 서유리에게 말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서유리는 으, 하고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 곤란한 내용일까.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나는 음료를 마시면서, 물었다.
“이슬비?”
결심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돌린 순간에, 그 말을 들은 서유리는 놀란 얼굴로 어물거릴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직감했다. 그렇구나, 그럴 만도 하지. 팀의 불화니까. 그녀로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나는 타는 속을 달래려고 음료를 들이켰다. 그러나 달래지는 건 갈증뿐이었다.
“슬비가 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호의는 아닐 거야.”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두피가 조금 긁혔을지도 모르겠다. 아팠다.
“뭘까, 평소에는 잘 참고 있다가. 왜 하필…….”
“칼바크 턱스를 앞두고, 그러냐고.”
뒷말은 서유리가 대신 이어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서유리의 표정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도 음료수를 들이키더니, 이내 하아,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폐부를 채우는 밤의 정적은 무거웠다. 서유리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는 알고 있어.”
내 시선이 돌아갔다. 서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련했다.
“검도를 할 때부터, 보고 들었던 감정들이야. 모를 리가 없지.”
아아, 하고. 서유리는 말을 끊었다. 땅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하야, 오늘 싸운 이유가 뭐지?”
“……이슬비의 속 좁음 때문에?”
서유리는 피식, 하고 얕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다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나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래, 내가 작전 브리핑 중에 중요한 퀘스트를 하는 중이었지.”
관자놀이를 짚고, 과거를 떠올렸다. 이슬비가 나를 지적했었다. 평소대로였다.
“이슬비가 나한테 진지해지라고 말했지.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어.”
“그래서?”
서유리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이슬비를 자극했던 결정적인 말, 그것이었다.
“말했지, 나까지 진지해질 필요가 있냐고.”
그리고 그 다음부터 이슬비가 화를 냈다. 나한테 따지고 들었고, 나도 머리에 열이 올라서 말싸움을 일으켰다. 그러자 화가 난 이슬비가 나가버리고, 내가 뒤쫓았더니 마주한 상황이 그것이었다. 이슬비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라’, 그 말이 자그맣게 메아리쳤다. 나는 단지 침묵했다. 지금도, 그때도.
“……없지.”
오랜 침묵을 깨고, 서유리가 말했다.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서유리를 바라보았다.
“없으니까, 화를 낸 거야.”
서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퍼즐 조각이 흩어졌다.
“슬비는 언제나 진지해야 했거든. 어릴 때부터 계속,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각을 하나씩 맞춰간다. ‘이슬비’와 ‘진지함’…….
“세하야,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오로지 재능이 없어 진지해야만 했던 사람의 마음을.”
‘재능’과 ‘마음’…….
“잠재력의 밑바닥까지 긁어내야 너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잠재력’과 ‘동등함’…….
“……알고 있니, 세하야?”
그리고… ‘이세하’. 그 단어가, 퍼즐의 중심을 강타했다.
“나는…….”
퍼즐은 모두 맞춰졌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떠오르는 말들은 그것과는 무관했다. 나는 무조건 입을 열었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다.
이슬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말하려던 순간.
“세하야, 유리야!”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흐릿한 윤곽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김유정 요원, 팀 ‘검은 양’의 관리요원이었다.
그녀는 나와 서유리의 눈앞까지 와서 거친 숨을 골랐다. 안쓰러울 만큼 다급해보였다.
“하아, 지금, 슬비가, 하악…….”
‘이슬비’……?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내 몸이 움찔, 하고 반응했다. 그러나 대처는 서유리가 조금 더 빨랐다.
“유정 언니, 진정하고 말해 보세요. 슬비가 왜요?”
서유리의 눈동자가 진지해졌다. 나 또한 누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다급함에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슬비가, 지금……!”
내 시선이 서서히 움직였다. 무언가를 직감했을까. 내 시야는 밤의 어둠을 넘었다.
“칼바크 턱스의 편지를 받고, 혼자 마천루 옥상에…….”
그곳에는 드높은 회색의 탑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를 오시하는 그 정점에…….
“그 편지에는!”
있다. 나는 자줏빛의 전하가 울부짖는 환상을 보았다.
“칼바크 턱스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칼바크 턱스, 그가 기다리고 있다.
*
이세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밤의 마천루는 고요했다. 차원종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자그마한 소리가 마천루의 침묵을 두드렸다.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어둠이 조금씩 눈에 익고, 이내 시야가 열렸다.
그리고 보였다. 검은 붕대의 남자, 마천루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는 칼바크 턱스가.
“……설마 혼자인가? 검은 양.”
붉은 동공이 나를 응시했다. 소름 끼치도록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조금 후회했다.
“그래서, 불만입니까?”
호오, 하고 칼바크 턱스는 탄성을 터트렸다. 내 싸늘한 목소리에도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기분 나쁠 만큼 어둠 속에서 빛났다. 새하얀 장갑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럴 리가. 다만 좋은 선택이라곤 농담으로도 말해줄 수 없겠군, 이슬비였던가?”
나는 침묵했다. 염력으로 비트를 일으켰다. 덜덜 떨리던 사물들이 서서히 내 뒤로 정렬했다.
“……당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흐, 하고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선은 나를 훑고 있었다. 날카로웠다.
“그 눈동자, 익숙하군.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몸이 움찔, 하고 반응했다. 칼바크 턱스는 간파하고 있는 걸까?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나?”
나는 말없이 비트를 조준했다. 흔들릴 이유가 없다.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재능 없는 자가 아무리 바닥을 바득바득 기어도, 결국 정상에 닿는 건 재능 있는 자뿐.”
그가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비트를 발사했다. 염력으로 조준하는 비트는 백발백중, 빗나갈 리가 없었다. 물체들은 모두 강철의 탄환으로 쏘아졌다. 그 안에 담긴 운동에너지는 평범한 사람의 연약한 신체 따위는 간단히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얕보였군.”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자줏빛의 전하가 내달렸다. 퉁, 하는 충격음과 함께 모든 비트들이 힘을 잃었다. 제멋대로 궤도를 바꾸며 땅바닥에 쳐박히고, 허공을 날고, 칼바크 턱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웃, 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눈앞에 칼바크 턱스가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다. 너는 재능 있는 자를 이길 수 없어.”
그가 손을 올리자, 알 수 없는 힘이 내 목을 죄고 나를 들어올렸다. 숨이 막혔다.
“이미 한계까지 긁어댔나? 하지만 그런다고 재능이 더 주어지지는 않지.”
잠재력을 말하는 걸까, 나는 바둥거리면서 시선으로 떨어진 비트들을 쫓았다.
“기회를 주마.”
그의 붉는 눈동자가 나를 관통했다. 나는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슬슬 정신이 혼미했다.
“진화에 동참해라, 이슬비.”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칼바크 턱스를 노려보았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러려던 순간에.
“……재능을 주마.”
턱, 하고. 그 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움찔, 하고 멈추자 그가 웃었다.
“너도, 나도 결국에는 똑같다. 너는 단지 재능의 한계로 열등감을 느끼고, 나는 종의 한계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뿐.”
칼바크 턱스의 힘이 느슨해졌다. 나는 하악, 하고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인간들은 멍청하다. 무섭다고 도망치고, 보다 더 용감한 자를 헐뜯지.”
칼바크 턱스의 붉은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의 과거를 말하는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그러나 아직 말을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면서, 호흡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정신이 점차 맑아졌다. 내 시선이 다시 떨어진 비트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 싫다. 열등하다. 더 높은 존재가 있고,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두려워하지?”
나는 그 비트들을 일으켜 반격하려다가, 멈칫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째서 망설이지? 언제나 냉철한 결론을 내려야 할 머리는 마비된 것처럼 동작하지 않았다. 가슴이 말했다. 이세하를 떠올리라고.
‘나까지 진지해질 필요가 있냐’, 라. 그래, 너는 모르겠지. 나는 오로지 바득바득 살아왔다.
“그래, 그 눈빛이다. 이슬비!”
칼바크 턱스가 광소했다. 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뒤엉켰다. 나는 오로지 바득바득 살아왔다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재능이 없다는 건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 그것이 분해서 더욱 열심히 단련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떨까. 이세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강했다.
“너한테 부족했던 것을 주마. 처음부터 그것이 당연했던 거였어. 그래야 공평하니까!”
정신이 다시 흐릿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뇌는 원활히 산소를 공급받고 있는데. 비트만 움직이면 된다. 그러면 방심하고 있는 칼바크 턱스를 일단 물러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대로 버스 폭격이나 레일건을 쓰면 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공중에 붙잡힌 채로,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저, 저의, 제 대답은…….”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마침 생각하고 있던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마천루의 침묵을 찢고 울려 퍼졌다.
[이슬비이이이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비트를 움직였고, 불시의 기습에 칼바크 턱스는 당황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대기를 찢으며 날아오던 무언가가 마천루를 강타했다. 푸른 위상력이 폭음을 일으키며 해일처럼 범람했다.
빛과 열의 태풍에 나는 웃, 하고 팔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힘의 파도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거칠게 솟구쳤다. 만약 물러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 파도에 당해 또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었겠지, 나는 이 기술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전기 유성검, 나는 그 위상력의 폭풍 사이에서 걸어오는 소년을 보았다.
“이세하, 지금 뭐하는 거야! 이 틈에 어서 칼바크 턱스를 쓰러트려야……!”
이세하는 나한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이름을 호명하며 소리쳤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내달렸다. 전력질주를 하는 것처럼 달려온 이세하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소리조차 비현실적이었다. 퍽, 하는 담백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볼이 얼얼했다. 나는 지금 맞은 걸까. 바닥에 떨어져 밀려날 때까지도, 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세하가 넋이 나간 나의 멱살을 붙잡고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을 터트렸다.
그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나는 멍하니 이세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내 머리가 흔들렸다. 이세하의 외침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너는 나에 대해 조금이라고 알아?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내 재능에 감사했을 것 같아? 네가 아는 ‘이세하’가 도대체 누구냐고!”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반박하고 싶은데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차원 전쟁 영웅의 아들? 유니온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도대체 누구, 나는 이세하라고!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수도 없이 떠든다고 내가 달라지냐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웃기지 마!”
아아, 그래. 떠올렸다. 그랬구나.
“너도…….”
나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리고 후우, 후우, 하고 거친 숨을 고르던 이세하는 서서히 내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세하가 내 멱살에서 손을 떼어놓을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있었다. 이세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세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위상력의 폭풍이 잠든 곳이었다.
“……뭐해, 이슬비.”
이세하는 갈무리해두었던 위상력을 검에 담았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검에 깃들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세하의 말을 듣고 상황을 깨달았다.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나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유리, 미스틸테인, J. 그리고 이세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가 지시해.”
네가 리더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조금 한심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비트들이 다시 일어났다.
이세하가 떨어진 자리에서, 무언가가 자줏빛 전하를 마구잡이로 피어올리며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주인님! 말도 안 돼, 주인님이 내가 아닌 너희를 선택할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칼바크 턱스는 발악처럼 부르짖었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반격이 없었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름대로 제안을 해준 모양이니,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났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칼바크 턱스.”
칼바크 턱스는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듯 싶었다. 상관없었다.
“당신 말대로, 저는 재능이 없습니다.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했죠.”
이세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을 보이고 서있을 뿐이었다.
“화가 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패배할 뿐이란 것. 억울했습니다. 어째서 나는 재능이 없을까, 원망도 자주 했습니다.”
수많은 기억들이 지나갔다. 내 열등감을 자극했던 그 과거의 가시들.
“하지만 칼바크 턱스, 저는 그렇다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칼바크 턱스는 다른 사람들을 겁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칼바크 턱스도 다르진 않았다.
“저는 재능도 없고, 열등감이나 느끼고, 여러모로 결점이 많은 존재지만…….”
단언했다. 그것은 칼바크 턱스에게,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릴 시간조차, 저는 낭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비트들을 조준했다. 칼바크 턱스도 거친 숨을 고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칼바크 턱스, 대답하겠습니다.”
칼바크 턱스의 손이 다시 펼쳐졌다. 자줏빛의 전하가 일어났다. 밝았다.
“……그 제안, 거절합니다.”
그리고 그 직후, 검과 전하가 충돌했다. 창과 전하가, 주먹과 전하가 폭음을 일으키며 난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나의 비트도 있었다. 버스가 떨어지고, 불꽃이 일어나고, 검이 폭발했다.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틈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마천루에서는, 빛이 터져 나와 밤을 밝혔다.
*
이슬비는 무슨 생각일까.
나는 그러한 의문을 가만히 던졌다. 마천루에서 칼바크 턱스와 난전을 일으킨 다음날, 나는 붕대를 감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상체만 일으켰음에도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칼바크 턱스는 후퇴하긴 했지만, 제압하진 못했다.
여러모로 수확이 없는 싸움이었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게임기를 두드렸다.
“……이세하. 내가 게임하지 말랬지?”
나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나를 지켜보는 이슬비가 있었다. 그녀는 후방지원이라서 부상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나를 언제나 간호하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침묵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할 짓이 없다고.”
그러나 이슬비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안 한다. 내가 안 하고 말지!”
나는 그러면서 게임기를 내던지려다가, 멈칫하고 얌전히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내 생명과도 같은 세이브 파일이 잔뜩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망가지면 안 됐다. 이슬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식사 가져올게.”
그녀는 짤막한 말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근슬쩍 게임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이슬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말은 하지 않았지.
나는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슬비.”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참고로 말해두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내 아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나는 그 말을 하고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슬비가 어떤 얼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침묵, 이슬비는 그 이후에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래.”
그러면서 이슬비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후회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반응이 너무 평탄했다. 그래서야, 나만 부끄러울 뿐이었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슬비가 멈칫했다.
내가 으응?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슬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엉망이야.”
나는 일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클로저 요원으로서는 성실하지 못해. 학생으로서는 게임중독자고, 동료로서는 사사건건 말싸움에 회의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않아.”
내가 멍하니 그 말을 듣다가, 발끈해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렇지만.”
이슬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청금석의 원석을 닮은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옭아맸다.
“아무것도 아닌, 이세하 그 자체로는…….”
그녀가 살짝 웃었다. 얼굴은 조금 열이 오른 채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멋있을지도.”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서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어물거리다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외쳤다.
“야, 이슬비!”
이슬비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흘깃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야, 그게!”
이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러한 말을 남긴 채로.
내가 무엇이라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뒤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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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막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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