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의 요새 엔딩 시점 이후 ~ 신서울지부 지휘통제실 이전(스포일러 有)
※ 철수가 에픽 내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소리 지르는 걸 처음 봐서 한 번 끄적였습니다.
“저, 민수현 요원님...혹시 저, 미움 받고 있는 걸까요?”
단독 브리핑 때문에 어쩌다 보니 수현과 단둘이 남겨지게 된 세하가 브리핑을 듣던 도중 갑자기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보통 브리핑 중에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수현은 침착하게 오히려 세하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세하 요원님?”
“아니, 한눈에 봐도 티가 나게 피하는 사람이 최근에 생겼다고나 할까요...”
“아, 철수 형 말인가요?”
수현이 세하가 말하는 사람이 철수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까닭은 지금 세하와 수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멀찍이서 지켜보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 두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수현의 시점에서는 일단 철수, 딱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하가 긍정의 의미로 허탈한 웃음을 짓자, 수현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애초에 세하와 철수가 직접적으로 맞부딪힌 상황은 이곳 남극에서 딱 한 경우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운명의 문을 닫을 때, 이세하 요원님과 철수 형이 같이 남았다고 하셨죠?”
“아, 네.”
“그리고 이세하 요원님은 남은 힘을 사용해서 철수 형을 바깥으로 내보냈고요.”
그 때를 대강으로나마 수현의 묘사를 통해 듣고 있던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회상해보는 철수는 상상 이상으로 절박해 보였다. 당연하게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할 사람은 철수라고 생각하고, 철수만이라도 내보내려고 이미 다짐까지 했던 세하가 아주 잠깐 사이 흔들렸을 정도로.
그것이 사실 바깥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엄청 큰 잘못이라는 걸 그 때의 세하도, 지금의 세하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수현이 그 때의 일을 딱히 책망하는 것도 아닌데 세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어쩔 수 없었어요...! 그 누가 남아 있었어도 저는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걸 나무랄 생각은 없어요. 다만 철수 형에게는 그 일련의 과정이 안 좋은 일을 떠올리게 했을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안 좋은 일이요?”
“철수 형은 저희가 지키지 못한 아이들에게 늘 갚지 못할 빚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 때, 철수가 세하에게 염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악같이 했던 외침이 있었다.
-또...또 잃는 건가...? 이번에도 나는, 지키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는 말에 어쩐지 깊은 사무침이 느껴졌었다고 그 순간에도 생각했었는데, 괜히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뒤이어 철수가 멀어지면서도 부르짖던 세하의 이름 또한 단전에서부터 울려오는 흡사 짐승의 그것과 같은 울부짖음이었다.
그 찰나의 상황만을 봐도 철수는 자신이 무언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에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철수에게는 - 그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 세하 또한 자신이 지켜야 할 아이로 투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 때의 상황은 철수에게 있어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던 지난 과거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예전보다 성장하지 못한 혹은 항상 이럴 때에만 나약하게 구는 자신에 대한 깊은 무기력감. 아마 그러한 것들로 인해 세하를 볼 때마다 철수는 철수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가혹한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거기다 수현이 덧붙이길,
“그리고 나중에 철수 형이 그러더라고요. 서지수 요원님하고 따로 약속을 한 게 있었다고요.”
“아...”
세하가 작게 탄식했다.
이건 세하한테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세하는 단순히 그 때의 일 때문에 철수가 단순히 자신에게 감정이 상했기 때문에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 복잡하면서도 커다란 뒷배경(?)이 존재를 했던 것이었다.
김철수와 서지수가 나누었다는 약속이 무엇인지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 수현 왈, 철수가 자신에게도 거기까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 대략 짐작하건대 아마도 세하를 지키겠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수현은 추론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세하는 무사히 돌아오기는 했으나, 어찌 되었든 철수는 서지수와 한 약속을 지키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서지수와 세하는 – 세하는 해당 약속이 있었다는 걸 방금에서야 깨닫기는 했지만 아마 서지수와 비슷한 입장이리라 - 딱히 철수를 책망하지는 않았지만 철수는 그 부분까지도 영 마음에 쓰이는 모양이었다.
세하는 괜히 얼굴을 긁적였다.
“요컨대 복잡한 게 많이 얽혔다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지금 세하와 철수가 당면한 일이, 단순한 일이든 복잡한 일이든지 간에 현재 두 사람의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수현은 세하에게 정확하게 그 부분을 집으면서 제시하였다.
“이세하 요원님, 철수 형이랑 이야기를 해보시겠어요?”
“하고 싶어도 저렇게 저를 노골적으로 피해서야...”
사실 세하가 수현에게 이와 같은 말을 꺼낸 것도 자신을 안간힘을 다해 피해 다니는 철수와 어떻게든 대면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수를 오랫동안 옆에서 봐왔던 수현의 조언이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였으니까.
“그건 저한테 맡겨주세요.”
그리고 이 일의 적임자였다는 듯, 수현은 세하가 수현에게서 듣고 싶었던 대답을 정확하게 해주었다.
한편 세하와 수현이 계략(?)을 짜고 있던 그 시각, 은하가 하도 수상쩍은 행동만을 하는 철수에게 일침을 가했다.
“아저씨, 너무 대놓고 피하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무얼, 말이냐.”
철수는 조금 마음이 뜨끔거렸지만, 모르는 척 은하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은하가 즉각 대답했다.
“세하 형씨 말이에요. 아이 참, 그걸 왜 들켰지? 하는 표정 짓지 말아요. 당연히 얼굴에 다 드러났기 때문에 알아차린 거니까.”
“다...드러났다고?”
“참고로 표정 뿐 아니라 행동도 되게 티 나요.”
잠깐 고민을 하던 철수가 다시 은하에게 질문했다.
“그렇게...티가 났나?”
“아저씨는 기척 같은 거 숨기는 재능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다고나 할까요. 아마 세하 형씨도 진즉에 눈치 챘지 않았을까요?”
“...!”
심지어 은하는 철수가 ‘누군가’에게서 몸을 숨기기 급급한지도 알아차려버렸다.
하지만 정작 철수는 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최근 들어서 세하가 자신이 숨어있는 방향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 은하의 말대로 이미 세하는 눈치를 채고도 남았다는 소리였다.
그걸 이미 눈치를 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있다는 건 두 가지 경우였다. 하나는 세하는 김철수라고 하는 전 교단 소속의 히트맨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거나, 아니면 철수가 먼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만약 후자라면 조금 곤란한데. 그 곤란한 감정 때문에 철수는 조금 열이 뻗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손등으로 입 부근을 가렸다. 이런 철수의 휘황찬란한 감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흥미롭게 지켜보던 은하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피해 다녀요?”
철수가 세하를 계속해서 피해 다니는 것이 철수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겠으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당사자와 제3자에게는 이상할 노릇이었다.
이걸 어디에서부터 설명할까 잠깐 고민하던 철수는 철수치고 나름대로 아주 잘 간략하게 결론을 은하에게 내주었다.
“나는...서지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약속이 뭐길래.”
“산맥으로 가기 전, 서지수에게 너의 아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건 지금 철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게 지키지 못한 맹세였다. 세하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문 안에서 철수는 자의는 아니었으나 세하를 두고 떠난 꼴이었으니까.
은하는 가장 결정적인 것을 물어보았다.
“서지수님이 그에 대해 아저씨를 책망하셨나요?”
이에 철수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철수의 눈매가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아니, 그건 아니다만...”
차라리 책망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철수는 천천히 회상했다.
모든 것이 일단락이 난 뒤에 철수는 서지수를 따로 찾아갔다. 호기롭게 찾아간 것은 좋았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철수는 일단 무릎부터 꿇기로 했다.
-미안하다, 서지수.
-응? 뭐가 말이야?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미안하다며 석고대죄를 하는 상황이라면 당황할 법도 한데, 서지수는 태연하게 철수가 처음 찾아갔을 때 그 자세 그대로 철수에게 태연하게 되물었다.
철수는 서지수에게 이것을 고할 때, 입안이 너무도 써지는 걸 느꼈다.
-이세하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완수하지 못했다.
-아, 그거?
뜻밖에도 서지수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철수가 놀란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서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서지수의 표정은 목소리에서 느껴진 것과는 달리 태연하다기보다는 언짢은 기색이었다.
이 시점의 서지수는 살짝 난처했었다.
이 사람의 올곧음 –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 을 대략적으로 짐작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아니, 사실 서지수는 김철수가 한번쯤은 자신을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는 것까지는 예상했다. 이렇게 무작정 무릎부터 꿇을 줄은 몰랐던 거지.
서지수는 일단 차분하게 설명부터 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분명 세하가 막무가내로 널 문 밖으로 내보냈겠지?
-그렇기는 하다만...
-아마 그 자리에 나랑 세하가 있었어도 세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냥 그런 예감이 들어. 우리 아들은 그런 아이니까.
아들인 세하 이야기를 하자, 서지수의 표정이 곧장 밝아졌다. 서지수에게, 세하는 그런 존재라는 걸 철수가 다시금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세하는 돌아왔잖아?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미안...하다.
...그걸 보고 나니 더욱 미안하다고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일어설 생각을 안 하는 철수를 서지수는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예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려는 건 아니었는지, 서지수의 근력으로도 철수는 가뿐하게 일으켜졌다.
-엄청 뚝심 있는 남자라고나 할까? 그런 뚝심, 어떤 상황에서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서지수는 그런 말을 하면서 먼저 떠난 어떤 전우를 떠올렸다. 뚝심 있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남자였다. 서지수는 그 남자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 중에는 어느 정도 자기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점을 가지고 행동하는 방법도 있었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서지수에게는 오히려 ‘자신만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서지수의 교관과 철수는 서지수가 가지고 있는 천성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그런 ‘자신만의 기준’이 너무나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
-가끔은 그 고집 좀 꺾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고집이라는 거,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넘쳐흘러도 문제. 아니, 비단 고집만 그럴까?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없어도 문제고, 너무 넘실거려도 문제인 것들 투성이다.
철수는 서지수의 그러한 표현이 낯설다는 듯, 그 단어를 되뇌었다.
-고집...이라는 건가?
-그래, 뚝심 아니면 고집. 둘 다 아귀가 비슷한 말이지.
자유분방함과 무책임.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고집을 단숨에 꺾으라는 건 무리일 터였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쉬웠다. 차원종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라는 임무만을 완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전쟁이 끝나자 그들이 서지수에게 내민 잣대는 그 강대한 힘에 대한 책임, 즉 활동의 제한이었다.
아주 호기롭던 시절에는 그딴 거 다 무시하고 깽판이나 칠까도 생각했지만 세하를 생각하여 관두었다.
아무튼 무턱대고 고집 좀 꺾어라, 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로는 되레 견고한 벽이 더 견고해지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처사이기는 했다. 그렇기에 서지수는 철수에게 아주 작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정 너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대신 이 부탁을 들어주도록 해.
-무슨 부탁이지? 어서 말해라.
그 부탁을 당장이라도 들어줄 기세인 철수에게 서지수가 웃으며 답했다.
-우리 아들이랑 이후로 마주치게 되면, 딱 한 번만이라도 좋아. 웃어줘.
-...
철수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방금 전 보였던 호기로운 태도는 어디를 가고 다시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서지수의 차분한 경위 설명이 철수의 귓가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세하의 그런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만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걸 세하도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
-...
-그렇다면 서로 불편한 얼굴보다는 웃으면서 마주보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서지수는 철수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억지로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그 모습이 어쩐지 웃겨서 되러 서지수가 웃음이 터지기는 했지만.
한편, 호탕하게 웃는 서지수와는 달리 철수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어렵군.
어렵다는 저 짧은 말이, 철수의 복잡한 모든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어려울 것 없어.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웃어주면 돼.
이번에는 반대로 서지수가 본인의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철수는 다시 한 번, 억지로 자기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입가가 찢어질 것 같은 얼얼한 감각에 곧바로 손을 뗐지만.
얼마나 입가 쪽 근육을 잘 안 썼으면 이런 작은 움직임에도 이토록 얼얼한 건지.
-마음이 가는대로, 라...
마음이 가는대로...우리 팀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보면 되는 건가? 그런데 서지수는 여기다가 전제 조건을 덧붙였다. 마음이 가는대로, 웃을 걸. 마음이 가는대로 보는 건 가능한데, 웃기까지 하려니 철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노력하도록 하지.
그럼에도 철수는 이러한 서지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것마저도 거절하면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심각하게 망가지거나 닳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마 이것이 서지수가 말한 고집이라는 것일 것이다. 이세하를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못 지킨 죄인이, 그 대신으로 부탁받은 이세하를 보고 웃어주지도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완전 무책임한 행동이지 않나.
이런 철수의 고군분투를 나름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리라는 걸 알았는지, 서지수는 서지수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당부 하나만을 했다.
-그래, 그래. 그러면 우리 아들 잘 부탁해~
“뭐에요, 이미 서지수님이 답을 내려주셨네.”
“그래. 그녀는 정말 대단한 클로저다.”
“그러면 아저씨는 서지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웃는 거요. 우리 앞에서는 잘만 하시잖아요.”
“그게...”
철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은하에게 어찌 되었든 간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이세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서...”
“하, 정말 서지수님 표현이 딱 맞네. 고집이 장난 아니야.”
그리고 은하는 이런 철수를 보며 서지수가 바라본 철수의 모습이 아주 정확했다는 걸 새삼 깨우쳤다. 친히 답도 내려주고, 나아갈 방향도 제시해주었건만 여전히 그것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는 것조차 철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그놈의 우직함이 또 뭐라고.
은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이렇게 답답해죽겠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속이 터질는지.
그럼에도 은하는 그런 핀잔을 말로만 할뿐,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뉘앙스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유인 즉, 간단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은하의 이러한 반응에 철수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작게 긍정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야 어떻게든 노력해보겠다고 서지수와 약속 같은 걸 해버렸으니까.
철수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철수가 마음만 먹고 행동을 한다면 이세하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세하는 검은양 팀 소속이고, 철수 본인은 시궁쥐 팀 소속이니까. 같은 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세하와 철수가 같은 팀 소속이었다고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더 철수가 세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리라. 물론 지금도 철수가 세하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건 티가 나기는 했다만.
그렇게 또 속수무책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서지수와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철수는 오늘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초기에는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는 있긴 하나 세하에게 어떠한 말이라도 붙여야 하는 의지정도는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지는 희미해지고 되러 세하를 향한 불편하기만 한 마음만 남게 되었다. 이대로 안 된다는 건 알았으나, 이미 회피하기에만 익숙해져버린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기에 철수는 오늘도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세하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와중 수현에게서 온 호출. 별 다른 추신 같은 건 없는 평범한 호출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별 생각 없이 철수는 수현한테 간 것이었을 테다.
시궁쥐 팀의 오퍼레이터는 보통 세린이 전담하였으나, 세린을 대신하여 수현이 대신 임무 전달을 할 때도 있었다. 전자든 후자든 지금의 철수에게 있어서는 무엇이든 간에 익숙한 상황이라, 아주 자연스럽게 임무 때문에 수현이 자신을 부른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호출에 응해 갔을 때 수현이 있기도 했고.
철수가 다가가자 수현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철수 형, 오셨어요?”
“무슨 일이지, 민수현? 임무인가?”
“임무...하하...임무라고...할 수도 있죠...”
임무냐는 질문에 수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직후 바로 철수의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교단의 처형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간혹 자신의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을 통해 대충 추론을 할뿐. 그런 몸에 배어진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철수는 자신의 배후에 누군가가 위치해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아주 조그마한 인기척일지라도 무척 민감하게 반응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게다가 인기척을 감지한 직후 같이 들린 목소리는,
“어...안녕하세요?”
“...?”
“저희, 오랜만이죠?”
“...!”
철수가 최선을 다해서 계속해서 피해 다닌 인물의 목소리였다.
세하는 자신이 본인의 등 뒤에 등장하자마자 굳어버린 철수의 등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악!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세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철수는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붙잡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있어야겠다는 수현의 충고를 되새기고 있었던 세하는 간발의 차로 철수의 옷깃을 잡을 수 있었다. 이를 세하에게 조언한 수현 또한 철수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철수의 앞을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이로써 철수는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요즘의 자신이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철수는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수현을 불렀다.
“민수현!”
거의 윽박지름에 가까웠다.
적에게나 지르던 격앙된 목소리에 더해 잔뜩 일그러진 철수의 얼굴을 보자 수현은 식겁했다.
“으악, 미, 미안해요, 철수 형!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세하 요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는 것 같았다고요!”
“그렇다고는 해도...!”
“김철수 씨!”
자칫 더 큰 언쟁으로 가기 직전에 세하가 철수를 말렸다. 여전히 철수의 얼굴을 **도 못한 채로 세하가 또박또박 수현을 위한 변론을 시작했다.
“민수현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먼저 부탁한 거예요. 김철수 씨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요. 민수현 씨는 제 부탁을 들어주신 것뿐이에요.”
“...”
“그러니까...”
그 뒤에 세하가 자신에게 한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세하의 표정 같은 것도 당연히 볼 수 없었다. 그야 철수는 지금 세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지금 철수의 시점에서 보인 것은 잔뜩 겁먹은 수현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 하나에 철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철수에게 있어서 수현은 아주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정도의 친분도 당연히 있는.
그런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하나, 그 친분 하나만을 믿고 이번 일과 관련된 화풀이를 그 대상에게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해야 할 일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저 수현은 세하가 부탁한 일 – 세하의 주장대로라면 - 을 해준 것뿐인데.
애당초 모든 일이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에서 세하와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했던 건, 수현이 아니라 철수 자신이었다. 충분히 할 수도 있었고, 해야만 하는 명분도 있었다. 서지수와 약속했으니까.
그걸 철수는 잔뜩 겁먹은 수현의 얼굴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못나서 못 다한 일을 기꺼이 대신해준 소중한 동료한테, 자신의 영 불편하기만 한 감정과 마주해야 한다는 불쾌감 하나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버럭- 화를 낸다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그렇기에 철수는 수현에게 사죄했다.
“미안하다, 민수현. 소리를 질러서.”
“괘, 괜찮아요! 조금 놀랐을 뿐이지, 정말 괜찮아요.”
“미안...하다.”
“괜찮다니까요.”
수현이 괜찮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철수의 사과는 몇 차례나 더 이어졌다. 겨우 철수를 진정시킨 수현은 갑자기 철수의 등 너머로 고개를 뻗었다. 이에 철수는 수현이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철수의 등 뒤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럼 두 분이서 잘 이야기 나누세요!”
“...!”
그제야 철수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세하가 아직도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바로 자기 등 뒤에 있다는 걸. 당장 눈앞에 갑자기 들이닥친 수현과의 감정전 때문에 바로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세하가 수현의 말에 대답을 하는 건 못 들은 것 같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수현은 이미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철수는 이에 무척이나 난감해졌다.
세하와 단둘이 있을 만한 자신감만큼은 아직까진 없어서, 미안하지만 수현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지만, 수현은 이미 그 말만 남긴 채로 저 멀리 가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사전에 수현은 자리가 마련되면 바로 빠지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서지수가 철수에게 했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졌다.
모든 대화의 시작은 어색한 침묵에서부터다.
“...”
“...”
기껏 마련한 자리인데 침묵으로만 8분을 허송했다.
안 그래도 철수는 철수 본인을 말주변이 없는 인간이라고 평하는데, 하필이면 이번 대화 상대 대상이 자신이 몇 주간 있는 힘을 다해 피해 다닌, 아직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불편함만 가득한 감정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상대다보니 먼저 말을 걸 재간은 없었다.
그에 반해 세하는 철수와는 약간 다른 느낌으로 이 상황이 어색한 것 같았다. 아예 대놓고 자신을 몇 주나 피해 다닌 상대를 잡아다가 옆에 두게 만든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철수보다는 좀 더 대화할 의지가 가득 차 있으니 다행인 걸지도.
그랬기에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 건 세하 쪽이었다. 세하가 아까 철수에게 했던 거 같은 말을 또 꺼냈다.
“저희, 오랜만이죠?”
“...그렇군.”
“할 이야기가 참 많은데, 말할 겨를이 없었네요.”
“...”
세하의 저 말에 철수는 자기도 모르게 양심이 찔렸다.
그 말할 겨를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당사자였기에 철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세하와의 대화 하나하나에 자신의 오점이 쿡쿡 쑤셔 박히는 것 같아 철수는 겨우 짧은 대꾸나 반응 정도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그마한 햄스터 같은 모양새의 철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세하가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죠?”
“...?”
갑작스러운 고백에 철수는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뭐가 이기적이라는 건가. 세계를 위해 자신이 희생해야 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이기적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줄곧 자신이 더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지 않았던가...내 멋대로 다짐을 하고, 그걸 타인이 당연하게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러다 끝내 자신의 힘이 부족해 그 다짐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자신을 신랄하게 책망하지도 못하는...
세하는 어떤 상황에서의 자신이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하였던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김철수 씨 입장을 생각도 안 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거요.”
“운명의 문...에서 말인가.”
“네.”
뭐...철수의 의견을 물어**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만큼 급박했으니까. 현실과 이어진 포탈이 닫히기 직전의 상황에 태평하게 토론을 나눌 물리적인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리가.
참 신기했다.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생각 외로 차분하게 그 때의 상황을 곱씹고, 또 판단도 제법 이성적으로 잘 내리게 된다. 아니, 철수가 세하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지는 벌써 몇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몇 주라고 하는 건 나는 자각을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제법 융통성 있고 타당한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철수는 어쩐지 한없이 위축되어지는 아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다만 그저 후회가 될 뿐이지. 그래, 사무친다고 할까.”
“사무친다고요?”
“나에게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우리 둘 다 빠져나올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무의미한 전제.”
세하가 눈을 천천히 한두 번, 크게 깜빡였다.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신 건...”
“그 때로 돌아가 봐야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철수는 드디어 인정했다.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걸. 기적적으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한들, 희생된 아이들을...이세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더군.”
“...”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털어놓고 나니 어쩐지 후련해진 감도 있었다. 같은 팀원들에게조차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앙금.
아니, 오히려 너무 가까운 사이라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걸까?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 미래, 은하, 루시, 수현 등등 – 괜한 짐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한 번 말을 트는 게 어려웠을 뿐이지, 이제는 그냥 담아왔던 모든 생각들이, 감정들이 입을 통해서 술술 불어졌다.
“미안하다. 내 스스로의 나약함에 짓눌려 있던 나머지 이세하, 너의 마음도 같이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서.”
“...”
“그 때, 네가 운명의 문 밖으로 나를 내보낼 때...나는 너에게서 내가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떠올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뭐라고.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제멋대로 누구한테서 누구를 투영을 한다는 건지.
재수 없게.
이런 소리를 지금 이세하에게 듣는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에 대해 너의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
“하지만...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사실 네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기뻐했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내가 너의 귀환에 이바지한 것은 일절도 없기 때문에.
“그 문에서 나 혼자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내가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네가 다시 돌아온 것은 내 권한이 아니었다. 즉,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겨우 이 말을 할 수 있겠군.”
철수가 세하를 향해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였다.
“돌아와 줘서 정말로 고맙다, 이세하.”
“...”
세하는 그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아...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일까? 나름 하고 싶었던 말, 전해야 했던 말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온 거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그런 거 괜히 신경 쓰지 말자.
“김철수 씨. 저도 김철수 씨에게 사과할 일이 있어요.”
그냥 지금 내가 느낀 것들을 전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될 테니까.
세하가 자신도 사과할 일이 있다는 소리에 이번에는 철수 쪽에서 놀란 감정에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세하의 진솔한 사과.
“죄송해요. 저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에, 김철수 씨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점이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 또한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이세하, 너는 또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러한 선택을 하겠지. 안 그런가?”
철수의 말이 맞았다. 아마 세하에게 또 같은 기회가 온다면 세하는 필시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세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그렇겠죠.”
“그럼 다음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좀 더 힘을 키우면 된다. 그뿐이다.”
누군가가 희생을 하는 건 다시는...겪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이건 언제나 변함이 없었을 철수의 다짐이자 목표였다.
“김철수 씨뿐이겠어요?”
이런 철수의 담담한 다짐에 세하가 피식 웃었다.
“저 또한 더 강해져야죠.”
“그래. 그럼...결론이 난 것 같군.”
이렇게 좋게 잘 끝날 수 있었던 것을...자신은 왜 그렇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피해왔는지 모르겠다. 약간의 회한이 들었다.
“역시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했어야 했군.”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저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셨던 건데요?”
“그게...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안해져가지고...”
“...저 아무래도 김철수 씨에게 계속해서 사과해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줄이야...
이 후로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가며 미안하다는 둥, 고맙다는 둥의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렇게 아까보다 훨씬 더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 세하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이렇게 된 거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 뭔데 그러지? 뭐든지 들어주겠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엄마가 떠나기 전에 조금 아리송한 당부를 해서요.”
서지수가 세하에게 남긴 요상한 전언은 바로 이거였다.
-철수랑 사이좋게 지내~ 알았지? 엄마가 불시에 체크할 거야~?!
그것도 활자 메시지가 아니라, 육성 메시지로다가!
이런 엉뚱한(?) 서지수의 숙제(?)에 세하의 반응은 당연히 이러했다.
“처음에는 내가 애도 아니고...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걸 왜 매번 체크당해야 하는지 이상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래. 이세하, 너와 관련된 일로 서지수에게 따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그 때 일을 염두로 두고 있는 거겠지.”
세하는 이제야 오랜 수수께끼 하나가 풀린 느낌이었다.
당연히 앞뒤 맥락을 다 잘라먹은 서지수의 저 전언은 세하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같이 들었다. 어떻게 김철수 씨와 내가 요새 서먹한 걸 알으셨던 거지? 그 때는 서지수가 무심해보이지만 그래도 눈썰미가 좀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마 이 말을 꺼낸 시점에서 이미 서지수는 철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을 테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들에게 할 수밖에 없는 걱정 어린 말이었던 거고.
세하가 질문했다.
“거기서 엄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데요?”
“지금, 너와 내가 한 대화와 크게 다른 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지수도 나한테 부탁을 하나 했었지.”
이야기에 푹 빠져버려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래요? 뭔데요?”
“너를 보고 웃어달라고 하더군.”
세하가 방울이 터지듯 웃음을 빵- 터트렸다. 이것이 이렇게 웃긴 일인가? 라고 잠자코 있던 철수에게 세하가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담백하게 감상을 표했다.
“엄마답네요.”
“그런가?”
“그런데 그건 이미 하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서지수가 철수에게 내린 퀘스트 성공 여부에 대해 이렇게 평하는 세하에게 철수가 아주 진지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한테 웃었던가? 기억이 없는데...”
“분명히 웃어주셨어요.”
그것도 아주 환하게.
하지만 이걸 당사자는 안 한 거라고 여기고 있다면...이 때 세하의 머릿속에 아주 기발한 방법이 스쳐지나갔다.
자신과 철수의 숙제(?)를 동시에 성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그럼 엄마한테 확인받을 겸...김철수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다만,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렇게 시간 많이 뺏는 건 아니에요.”
세하는 어째서인지 조금 장난기 가득한 – 저렇게 웃는 모습은 또 모자(母子)가 똑 닮았다 - 얼굴이었다.
“그냥, 다시 웃으시면 돼요.”
삐빅-
갑작스러운 메시지 수신음에 힐데가르트는 서지수에게 말했다.
“메시지가 온 거 같은데?”
“아, 괜찮아요, 언니. 마저 일 끝나면 봐도 될 거야.”
한창 임무와 관련된 걸로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던 참에 깜빡하고 진동 혹은 무음으로 해두고 오지 않은 휴대 전화가 원인이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계속 신경을 쓰는 것 같은 모양새에 힐데가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말고 확인하는 게 어때? 세하한테서 온 연락일 수도 있잖아.”
힐데가르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서지수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지수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답장도 보내지 않고 바로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힐데가르트는 무심하게 물어보았다.
“뭔데 그래?”
“아,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라면서 기분은 무척 좋아 보이는데. 힐데가르트는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서지수의 프라이버시기도 해서 딱히 묻지는 않기로 했다.
힐데가르트의 추측대로 그 메시지는 세하에게서 온 것이었다. 다만 별 다른 시시콜콜한 근황 같은 이야기는 없고, 딱 한 장의 사진만이 도착하였다.
이런 식의 자세를 취하라고 - 휴대 전화의 셀카 모드로 찍어낸 것 같았다 - 능숙하게 브이(V) 자를 하는 자신의 아들과, 그 옆에서 어색하게 반대 방향으로 브이 자를 하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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