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트는 레비아. 몇 차례 몸을 뒤척인 끝에 그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을 뜬 레비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침대 옆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에서는 수많은 건설기계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늘어서 있었다. 많은 사람이 건물 자재들을 옮기고 쌓아 올리며 새로운 건물들을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바쁘고 정신없어 보였지만 동시에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죠. 전쟁은 끝났었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레비아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섰다.
쏴아아아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레비아는 한 달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
.
.
"끝이다. 미천한 존재들이여."
차원종. 이름 없는 군단의 군단장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던 도중 군단의 총사령관 아자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한계에 몰린 유니온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전면전에 나섰지만, 아자젤의 압도적인 힘에 패배를 목전 앞에 둔 상황이었다.
"발목 잡지 말라고 이세하-!!!"
"나타 너야말로-!!!"
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난 나타와 세하의 등장으로 상황은 일변했다.
이전 더스트와의 싸움에서 입은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강력한 힘과 완벽한 협공을 구사하며 아자젤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아자젤의 힘은 강력했고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부상이 발목을 잡아 싸움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격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죽어라-!!!"
"끝이다-!!!"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가 터져 나오면서도 끝까지 검을 휘두른 그들은 마침내 아자젤의 육체를 베어 갈랐고 이어서 생성한 보라색과 푸른색의 불꽃으로 그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자젤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영혼만을 남겨 도주를 꾀했다.
"이제 그만… 영원히… 잠들라고…!!!"
그 순간, 부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볼프강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남아있는 힘을 짜내 그 영혼을 자신의 책에 봉인시켰다.
총사령관을 잃은 군단 빠르게 무너졌고 이를 놓치지 않고 유니온과 클로저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총공격에 나섰다. 그렇게 수많은 피해와 희생을 치른 끝에 제2차 차원전쟁은 인류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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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슬슬 가봐야겠죠?"
회상을 마친 레비아는 샤워기를 끄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샤워실을 나온 레비아는 옷을 갈아입곤 출입문 옆에 놓여있던 상자를 들고 방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그녀가 도착한 것은 의료실이었다.
전쟁에서 부상를 입은 사람들 중 클로저들을 전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시설, 그 안으로 들어선 레비아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한 개인실 앞에 멈춰섰다. 심호흡을 한 레비아는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노크를 했다.
"나타님? 들어가도 될까요?"
"? 아, 들어와."
잠시 후 문안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허락이 떨어지자 레비아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누워있던 나타가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아자젤과의 최종전투에서 그 공격으로부터 다른 클로저들을 보호하기 위해 원래라면 흘려보냈을 공격도 전부 정면에서 맞받아치며 싸웠던 그는 전신이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부상을 입었고 결국 싸움이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은 이세하와 함께 특수 의료 동으로 옮겨져 집중 치료에 들어갔다.
의료진들의 전력을 다한 시술 끝에 다행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그 후 개인 병실로 옮겨져 장기 입원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레비아는 그런 나타를 간호하기 위해 매일 아침 병실에 들러 환복을 돕거나 거동이 불편한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잘 주무셨어요?"
"뭐 그럭저럭? 너무 누워만 있으니 오히려 전신이 쑤시는군."
장난스럽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나타. 이에 레비아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도왔다. 나타는 그럴 필요 없다며 거부하려 했지만, 그녀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도움을 받기로 한다.
그렇게 그를 자리에 앉힌 레비아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이병실로 옮겨졌을 때와 비교해 안색이 많이 좋아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인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러다 얼굴 닳겠다."
"아! 죄송해요……."
그런 레비아를 마주 보던 나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지적했고 이에 놀란 레비아는 시선을 돌리곤 바로 사죄했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나타는 소리죽여 웃었고 레비아도 곧 장난이었단 걸 깨닫고 불만을 말하듯 볼을 부풀렸다.
"복어흉내는 그만 내고 슬슬 시작하라고."
한참을 킥킥거리던 나타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레비아도 정신을 다잡고 손을 뻗어 그의 웃옷을 손에 잡았다.
천천히 옷을 벗기자 전신을 뒤덮고 있던 붕대가 나타났고 레비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풀고 조심스럽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그러자 붕대로 감춰둔 수많은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
괴로운 눈길로 이를 바라보는 레비아. 아자젤과의 전투로 최근에 생긴 상처는 물론 그동안의 그가 겪은 힘겨운 삶을 나타내는 수많은 흉터 자국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를 간호하면서 몇 번이나 봤던 광경이지만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씁쓸한 느낌을 참으며 새로운 붕대를 꺼내 정성스럽게 그의 몸에 둘렀다.
".....후~. 끝났어요."
"아. 고맙군."
잠시 후 붕대와 의복의 교체가 끝나자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나타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다른 팀원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혹은 전쟁 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흠…. 그럼 네 말대로면 이제 교통수단 쪽은 보수가 끝났단 거냐?"
"네. 어제 저녁에 보니까 전철이나 버스도 멀쩡히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러던 중 나타는 교통수단은 다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단 소식에 관심을 가지더니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나타님? 왜 그러세요?"
이를 이상히 여긴 레비아가 질문을 던졌지만, 나타는 이를 듣지 못했는지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아. 레비아. 다음 주에 올 때는 외출복 좀 챙겨와라."
"네? 아니 왜요?"
갑작스러운 나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레비아가 의문을 표하자 나타는 이번엔 좀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어제 비실이가 와서 상태를 점검하더니 이제 이 지긋지긋한 병원 밖으로 외출해도 될 정도로 호전됐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얼마 전 꼰대한테서 좀 신경 쓰이는 정보를 들어서 말이야. 한번 가봐야 할 곳이 생겼어."
"어…. 저기 혹시 가시려는 곳이 멀리 떨어진 곳인가요?"
"뭐…. 몇 시간 만에 다녀올 거리가 아니긴 하지."
설명을 들은 레비아가 조심스레 질문하자 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럼 좀…. 아무리 김재리님께서 외출을 허락하셨다고 해도 혼자서 멀리 나가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타의 설명을 이해한 레비아가 걱정스레 질문했고 이에 나타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 설마 이 나타님께서 조금 아프다고 큰일 날 사람으로 보이냐?"
"그, 그건 아니지만…."
나타의 말대로 그는 위상능력자 중에서 손꼽히는 강함의 소유자이다. 그런 그가 비록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지라도 위험한 상황에 놓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레비아도 물론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걱정하고 안 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말을 흐리며 우물쭈물거리는 그녀를 보곤 나타는 한숨을 쉬며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렇게 걱정되면 너도 따라오던가?"
"……네?"
나타의 제안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레비아.
"어……. 제가 따라가도 되는 건가요?"
"뭐 상관은 없어.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는 거면 모를까 너 한 사람 정도라면 아무 문제 없어."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의 동행을 허락한 나타에게 레비아는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 얼떨결에 답했고 이에 나타가 흔쾌히 수락하며 다음 주의 일정이 정해졌다.
.
.
.
일주일 후.
"후우~오래간만에 바깥공기로군…."
이른 아침. 레비아가 가져온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타는 병원 밖으로 나와서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지개를 켰다.
"저, 나타님.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시면 상처가…."
이를 불안 불안하게 지켜보던 레비아가 걱정스레 충고하지만, 나타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를 얼버무렸다.
"자~그럼 빨리 출발해 보자고? 시간도 촉박하고 말이지."
그렇게 나타는 레비아를 이끌고 유니온 근처에 있는 기차역으로 이동하였다. 기차역에 도착한 나타는 전광판과 자신이 예매한 표를 비교해보곤 잠시 생각하더니 레비아에게 물었다.
"30분쯤 뒤에 도착한다고 하니 그전에 필요할 만한 걸 사두자고."
나타의 제안에 레비아도 동의했고 두 사람은 기차역 구석에 열려있는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마실 것 등은 사곤 기차를 타기 위해 개찰구로 향했다.
"후우….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군."
잠시 후 지정된 좌석에 앉은 나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후 그러게요. 아직 다시 운영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럴까요?"
"뭐 급했던 녀석들은 운영을 시작한 날 바로 이용했을 테니. 뭐 나로선 조용하고 나쁘진 않네."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도중 레비아는 눈에 나타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 가방은 뭔가요 나타님?"
"음? 아아……. 뭐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용할 물품이 좀 들어있다고 해야겠지. 그것보다 도착예정시간은 어느 정도더라…."
레비아의 질문을 얼버무리며 다른 화제로 대화 내용을 돌렸다. 이에 레비아도 더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타가 말하는 화제에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말 많이 바뀌셨네요.'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레비아는 문득 나타의 또 다른 변화에 살며시 미소지었다. 차원전쟁 이전의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렇게 평화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전의 나타님이었다면 이야기를 해도 까칠하게 대답하고 곧바로 대화를 끝냈을 텐데….'
이전 숨만 쉬어도 느껴지는 고통 탓에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던 나타는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 도중에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느라 느긋하게 대화를 가진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로는 들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은 듯이 여유로운 태도로 본인 스스로 대화를 걸어오는 빈도가 늘어갔다.
"뭐라고 할까….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기쁘네요."
"?뭐라고?"
순간 레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입으로 내뱉었다. 다행히 말을 하고 있던 나타는 이를 못들은 눈치였고 곧바로 알아차린 레비아가 별일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레비아는 순간 자신이 왜 당황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차를 타고 이동한 두 사람은 낮시간이 돼서야 목적지였던 여수에 도착했다.
"흐음~여기가 여수인가? 서울에 비해 아직 재건작업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군."
"그러게요. 역시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럴까요?"
아직 주변에 보이는 무너진 건물을 잔해나 파괴의 흔적들에 레비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 후 이루어진 보수작업은 각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탓에 외각에 위치한 지역일수록 작업이 늦어졌다.
아직 살고 있던 집이 재건되지 않아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레비아는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미안함을 느꼈다.
"...뭐 우리가 이렇게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만 움직이자고. 오늘 안에 돌아가자며?"
"아, 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나타는 밝은 어투로 말하며 그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에 레비아도 상심을 떨쳐내고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타의 주도로 한참을 걸은 그들을 약 한 시간가량의 이동 끝에 어느 인적 드문 살길에 도착했다.
"저…. 나타님.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죠?"
울창한 식물 탓에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산속을 헤매던 레비아가 나타에게 걱정스레 질문했지만, 나타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갈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비아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같은 질문을 한 10번째 할 때쯤이었다.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제야 레비아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듯 뒤돌아보는 나타. 그 안색은 아까와 비교해 확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저…. 저기 나타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뭐……. 괜찮아. 조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야."
레비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나타는 쓰게 웃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었냐고 물었던가? 걱정하지 마. 제대로 가고 있으니까……. 그래. 착각했을 리가 없지."
레비아의 질문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나타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레비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뒤를 바싹 쫓아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은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넓은 평지였다.
산 중턱에 존재하는 그곳은 걸어왔던 길과 달리 식물이 자라나지 않았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건물의 잔해… 인가요? 그것도 꽤 오래된……."
레비아의 말대로 그곳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나 망가진 기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
나타는 이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건물 잔해들 속으로 걸어갔다.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눈길로 흩어진 잔해들을 하나하나 쓸어가며 걸어가던 나타는 다른 곳에 비해 잔해가 적게 흩어진 넓은 공간 앞에서 멈춰섰다.
"저… 나타님? 여긴 대체……."
말 걸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나타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레비아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이곳에 도착하면서부터 들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이에 나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답을 알려줬다.
"……예전…. 한 10년은 넘었으려나…. 아마 이곳엔 야구 소가 있었을 거야."
"연구소라면……?"
하지만 자신 말을 들은 레비아가 아직 감을 잡지 못한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타는 살짝 미소지으며 좀 더 정확한 답을 알려주었다.
"위상력 강화 시술. 그걸 진행하던 연구소와 그 실험체들을 가둬두던 수용소가 이곳에 세워져 있었어."
"……?!!!!"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레비아. 그녀는 경악한 눈빛으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마주 보았다. 이에 머쓱해진 나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네 생각대로 이곳은 과거 전쟁의 여파로 부모를 잃은 내가 운 없게도 끌려들어 온 곳이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는 실험체들이 서로의 목숨을 건 사투를 펼쳤던 장소고."
말하면서 무릎을 꿇은 나타는 바닥에 새겨져 있던 붉은 얼룩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었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이 연구소에서 죽어 나갔지. 개중에는 살아보겠다고 연구원들에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멍청이나 이미 죽고 없을 부모를 찾는 버러지 혹은 스스로 자살을 행하는 약골들 등등 다양한 녀석들이 모여있었지."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붉게 물든 먼지를 보며 나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도 처음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위로해주겠다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지. 뭐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행동은 어느 날 연구원들이 실시한 실험체간의 살육전을 시작으로 끝을 맺었어. 살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얄팍한 동병상련 같은 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지."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기 위해 같은 처지에 놓인 상대를 향해 살기가 담긴 무기를 휘둘렀던 것을 떠올리며 나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녀석들의 목숨을 아무 망설임 없이 끊었었지. 그렇게 나는 실험체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우며 정말로 구차하게 살아남았어. 그러던 중 유니온의 방침 변경으로 연구는 백지화가 결정되었고 자신들의 더러운 부분을 감추기 위해 유니온은 클로저를 투입했어. 대부분의 실험체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살해당했고 반항하는 녀석들도 나를 제외하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지. 나도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당시의 나로선 클로저 한두 명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게 한계였고 결국 제압당하고 말았지."
"....나타님……."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는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던 가방을 열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가방에서 나온 건 길고 평평하게 가공된 석판과 액자였다. 석판에는 수많은 숫자가 적혀있었고 액자 속에는 어린아이들의 초상화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하지만 내 실력을 눈여겨본 유니온 놈들을 날 죽이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날 살려뒀고 내가 죽인 클로저놈들 대신 날 자신들 산하에 두고 사용하려한 거지. 그 당시의 나는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어."
"...그랬군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며 나타는 석판에 위상력을 두르고 그대로 땅에다 꽂아 넣었다. 어렵지 않게 콘크리트로 가공된 바닥을 뚫고 들어간 고정된 각목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타는 다른 석판으로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나와 유니온의 뒤에서 비밀임무를 하던 나날 동안 난 한가지 꿈을 계속해서 꾸게 되었지."
"꿈… 이라고요."
"그래. 내 손에 죽은 실험체들, 내 눈앞에서 죽어가던 실험체들이 전부 나타나 나에게 저주와 원망의 말을 퍼붓는…… 거지 같은 악몽이었지."
석판을 모두 세운 나타는 이번엔 액자 속의 얼굴과 석판에 새겨진 숫자를 비교해가며 각 석판 앞에 액자를 세웠다.
"뭐 처음엔 밤잠을 설치고 괴로워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 오히려 그 꿈을 동력원 삼아 오기로라도 살아보겠다며 의지를 불태울 원동력을 삼기도 했으니 말이야. 뭐 지금 와서 생각하면 죄책감을 무시하며 원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급급했던 건지도 모르겠군."
액자의 배치를 마친 나타는 쓰게 웃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레비아를 돌아보았다. 레비아는 괴로운 표정으로 나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분들에게 사과를 하려고…."
나타가 느꼈을 죄책감에 공감한 레비아는 눈물을 흘리며 나타가 이곳에 온 이유를 짐작하고 이를 입에 담았다.
"?아닌데? 내가 사과를 왜 해?"
하지만 그의 입에서 들려온 것은 그녀의 짐작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예?"
이에 한순간 사고가 정지한 레비아는 멍한 표정으로 나타를 바라보았고 이에 나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사과할게 뭐 있어? 만약 그 녀석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역으로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미안한 감정은 있더라도 내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내 앞에서 죽은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들이 죽은 건 녀석들이 약했기 때문이야. 연민의 감정은 느껴도 역시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그, 그럼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건가요?"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나타의 반응에 혼란스러워진 레비아는 그의 진의를 물었고 이에 나타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뭐~굳이 이야기하자면 두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 그중 하나는…. 그 녀석들의 명복을 빌어주려고 왔다고 해야 할까?"
말을 마친 나타는 가방에서 비싸 보이는 와인병을 꺼내 들었다.
와인병을 잠시 바라본 나타는 엄지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별 어려움 없이 코르크 마개를 벗기곤 내용물을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건……."
"얼마 전 병문안 온 좀도둑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좀 구해달라고 한 제법 비싼 술이지. 나 참 그 여자…. 어차피 자기도 슬이슬쩍 한 걸 거면서 더럽게 비싼 조건을 걸더라니깐."
레비아의 질문에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험담을 하며 나타는 내용물을 모두 토해낸 병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는 위상력을 조작해 자신의 손끝에 작은 불꽃을 피웠다.
"아까 말했지만 난 딱히 녀석들에게 사과해야겠단 생각은 없어. 하지만 동시에 그 녀석들이 나를 원망하더라도 딱히 반박할 생각도 없지. 내가 그 녀석들의 목숨을 빼앗은 대가로 살아남은 건 사실이니까. 뭐 내가 욕먹는 걸 즐기는 **는 아니니 원망하지 않는 게 더 좋긴 하지만 말이야."
자신의 손끝에서 일렁이며 춤을 추는 보라색 불길을 바라보던 나타는 이를 자신의 발치로 떨어뜨렸다.
화르르르르륵……!!!
떨어진 불꽃은 바닥에 흩뿌려진 와인에 닿자마자 이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 주변을 매워갔다.
영롱한 보랏빛 불꽃의 중심에 서서 자신이 세운 석판과 액자를 내려다보며 나타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렇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녀석들이야. 상황이 조금만 달랐어도 나 또한 그 녀석들처럼 허무하게 죽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이렇게 명복이라도 빌어주는 게 내가 그 녀석들에게 표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란 거지. 뭐 확실히 기억하는 건 내 손으로 직접 죽인 녀석들 정도라 묘비를 만들어 주는 건 이게 한계지만 말이야."
"...나타님…."
밝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나타. 하지만 그와 오랜 시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레비아는 그 속에 섞여 있는 괴로움과 슬픔 등의 감정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에 레비아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
순간 주변에 울려 퍼지는 정체불명의 이명. 깜짝 놀란 레비아가 곧바로 경계태세에 들어가려 했지만, 나타가 그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곧 다시 한번 이명이 울려 퍼지며 타오르는 불길 위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희미하고 수증기와도 비슷한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이건……."
"이게 내가 이곳까지 온 또 다른 이유야."
긴장한 레비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킨 나타는 천천히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 걸어갔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새로 얻은 힘 중에는 하나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어. 이 힘을 얻게 되면서 나는 영혼의 존재를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됐고 동시에 강렬한 감정을 느낀 상태에서 발현된 위상력에는 영혼의 잔재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차분히 설명하며 나타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자신을 둘러싼 정체불명의 존재를 마주했다.
"그리고 꼰대에게 이곳의 위치를 들은 순간 난 녀석들의 명복을 빌어주어야겠다는 것과 함께 이 녀석들이 죽기 전에 발휘한 위상력에 묻어나온 영혼이 원혼이 되어 이 자리에 머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 뭐 개인적으론 빗나갔으면 했지만……. 결국 예상대로 그때 남은 영혼은 잔재가 원혼이 되어 이 자리에 머물고 있었군."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그저 주위를 돌아다닐 뿐인 영혼들을 씁쓸한 표정을 바라본 나타는 숨을 들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그때 느낀 감정이 어땠는지 이해한다는 개소리는 하지 않겠어. 그런 건 사람마다 천지 차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영혼의 잔재가 남은 걸 보면 분명 괴롭고 힘들었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버티고 있어봤자 달라질 건 없어. 혼자 살아남은 날 원망하고 싶거든 원망해. 너흰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또 내가 너희들의 원한이나 목적을 전부 이루어 줄 수 있다곤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논 연구원들만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그러니……. 그러니 이만 편해져라."
□□□□□.......!!!
나타의 말이 끝난 순간 영혼들은 일제히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듣기에 따라선 웃는 것처럼 혹은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원망하는 소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
이를 가만히 듣던 나타는 천천히 위상력을 끌어올렸고 그런 그의 힘에 반응해 타오르던 보라색 불꽃은 그 열기를 더해갔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영혼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며 사라져갔다.
"......저세상에선 편히들 쉬라고."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불씨들을 올려다보며 나타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했다곤 해도 자유로워졌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나타는 맑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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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나타로 테스크 포스를 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나타의 최책감은 엄청나죠. 개인적으로 어떤식이든 그 죄책감을 내려놓았으면 해서 이런 스토리를 써봤습니다. 이제 거의 다왔네요. 3주면 끝날 듯 합니다.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세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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