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챙겨온 짐이 꽤 되었기에 숙소에 먼저 들어가서 짐을 풀어놓기로 했다. 해운대 해수욕장이 고스란히 보이는 호텔이 두 사람의 숙소. 규모가 큰 것은 기본이었고, 객실도 깔끔하고 좋은 곳이었기에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숙소의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시설을 이용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우리 괜찮은 겁니까?”
세상의 물정은 몰라도, 지금과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데에는 큰 비용이 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파이가 조금 걱정된다는 눈빛을 띠며 볼프강에게 물었다. 침대에 앉은 채 그를 바라보는 파이의 시선을 받으며, 역시나 하는 표정을 보인 볼프강이 보던 책을 덮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 호텔의 마스터 되는 사람이, 우리 측 유니온 요원들에게 입은 은혜가 고마워서 우리 클로저들에게는 특별히- 비용 없이 이용해도 된다는 특권을 마련해줬어. 물론 사전에 미리 연락을 줘야 그걸 도와줄 수 있는 구조이긴 한데, 휴가 계획하면 이 볼프강을 빼놓으면 섭섭하지 않겠어?”
이미 모든 준비는 다 해놨다는 뉘앙스로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남기자 파이가 “볼프는 여전하네요.” 라고 말하며 기막히단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고, 볼프강 역시 마찬가지의 미소로 화답한다.
지금은 평화로운 부산이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은 유니온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전투가 벌어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해운대 인근 지역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우연의 일치인 건지는 모르나 격전지 중 한 곳이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지금의 호텔 근처였던 것. 그런데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고마웠던 걸까, 호텔 측에서 클로저들의 휴가를 책임지겠다며 유니온 측에 클로저 전용 휴양시설 유치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클로저들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하며 성황을 이룬 호텔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때를 회상하던 두 사람 중 볼프강이 먼저 떨쳐내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여기서 이용하는 시설들은 어지간해선 돈 안 들어가니까.”
“하핫,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네요.”
그렇지 않아도 숙소 비용부터 걱정했던 파이였다. 그간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밀린 급여를 받기는 했으나, 그 급여를 섣불리 쓸 수는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볼프강의 말대로 그녀는 도시에 관한 세상물정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가 언급했던 거지꼴 신세를 면치 못할 수 있다는 걸 담아두고 있던 것이다. 파이의 이야기에 뭘 걱정했는지 유추한 볼프강은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 휴양지까지 왔는데, 숙소에만 머무를 수는 없지 않겠어?”
과소비를 하는 것이 원인이었다 뿐이지,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만큼 돈을 이럴 때 쓴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휴가 중에 쓰는 비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네가 받은 돈들로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건데, 너니까 알려줄게. 그러니까 따라와. 그런 함축적인 이야기들을 담은 눈빛과 함께 파이에게 내민 손. 볼프강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말로만 그의 사적인 모습을 들었을 뿐 실제로 그에게서 뭔가를 본 것은 아니기에 의심을 벗진 않은 파이. 그러나 앞에서 이미 그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자신의 순간은 그와 함께였다. 곧 죽어도 그와 함께 동행하리라는 뜻에서 잡은 손이었으니, 이 또한 마찬가지라. 파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튼 가르침은 금물입니다.”
제 손을 잡은 파이를 일으키며 자신에게서 뭘 봤길래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지어버렸다.
“나도 돈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야.”
볼프강에게서 그런 답변이 나오자, 그제야 유쾌하게 웃어버리는 파이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유쾌하게 웃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믿어보겠다는 것만은 알았던 볼프강은 파이를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와, 볼프! 저것들 좀 보세요!”
신기한 광경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감탄사를 내뱉는 파이의 목소리가 볼프강을 향했다. 전경이 온통 푸른색을 띠고 있는 공간 안에서의 일이었다.
“그래. 잘 보이네.”
주변의 환경보다는 그녀의 모습이 더 재미있었던 걸까, 파이의 반응에 더 흥미가 간다는 목소리로 그런 파이의 반응에 응수해주는 볼프강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해운대 해수욕장 중앙에 위치한 아쿠아리움. 은은한 불빛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바다 속 세상을 두 사람은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건 부산에는 바다 속 탐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장난스럽게 던진 볼프강의 말에, 빨리 데려가달라며 눈에 불을 켜는 파이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계기였다. 그 세상에서 보이는 푸른 빛 광경을 바라보는 파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볼프강 또한 아쿠아리움 내부의 모습을 살폈다.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이런 곳을 찾는 건 그 역시 처음이었으므로.
또한 그 역시,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파이와 같은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는 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아쿠아리움의 끝에 들어서자 두 사람을 반긴 것은 기념품 매장이었다. 볼프강은 딱히 흥미가 없었지만, 파이는 팀원들에게 줄 선물을 주려고 고민하는 모양. 그런 모습을 보며 말려도 소용없겠다 싶었는지 한 사람 당 하나씩이라는 말을 남기며 허락을 하고 만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어떤 걸 선물해줄까를 고민하는 파이를 뒷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볼프강. 그러다 우연이었을까, 고개를 돌린 곳에 눈에 띄는 인형들이 있었다.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 인형들 중 하나를 골라 파이보다 빠르게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골랐던 인형을 계산한다.
마지막 선물용 기념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던 그 순간. 파이의 눈앞에 펭귄 모양의 인형이 그녀에게 갑작스레 나타났다. 순간 이게 왜 제 눈앞에 있는지를 고민했지만, 곧 그 인형이 파이의 품을 향하자 그것을 잘 받아낸 파이.
“마음에 들어?”
선물을 고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볼프강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어린 아이를 돌보는 선생님의 미소로 파이를 맞이하는 볼프강이 눈에 들어온 파이.
“이게....... 뭡니까?”
볼프강에게서 사적으로 뭔가를 받은 건 처음이었는지, 말투가 딱딱하게 변해버리자 속으로 움찔한 파이. 볼프강 역시 자신이 이렇게까지 인망이 없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연다.
“너한테 줄 선물 정도는 내가 사줘야할 것 같아서.”
예전이라면 선심을 쓰듯 얘기했었을 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의연하게 의표를 찌르는 한 마디였으나 그가 고심한 끝에 그러한 말을 꺼냈다는 것이 느껴져 자신을 의심할 정도의 한 마디라고 파이는 생각했다.
“....... 혹시 마음에 안 들어?”
그것을 확신한 건 그렇게 얘기한 이후 반응을 못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에 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이어서 받은 직후였다.
“.......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볼프.......”
조금은 감격한 걸까, 자신에게 되묻고 답하길 수차례 끝에 그렇게 대답한 파이. 그런 진심어린 반응에, 볼프강은 미소를 지으며 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아쿠아리움에서 빠져나온 이후, 두 사람은 관광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휴가다운 휴가의 첫 날을 보냈다. 두 사람은 지금처럼 마음을 놓고 누군가와 지금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가에 대한 고민마저도 버리며 매 순간들을 즐겼다. 그 순간에는 두 사람이 처음 접하는 것들도 있었고, 한 사람이 주도하여 한 사람을 위한 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주도한 쪽이 볼프강이 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것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즈음. 두 사람은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도 빠진 한산한 시간에 해운대 해수욕장을 걸었다. 해가 저문 탓일까, 뜨겁게 달궈진 바다를 타고 온 온풍이 아닌 선선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그 바람 사이로,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걷고 있었다.
“볼프.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도시에서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 있었고....... 어떻게 보내야할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바람에 맞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고마움을 표하는 파이의 모습에, 우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래. 알았다면 다음번에는 네 동생과 함께 와서 네가 직접 가이드해주도록 해. 자매간에도 이런 시간을 보낼 때도 있어야 하잖아?”
볼프강의 이야기에 놀라는 표정이 드러난 파이. 언젠가 제 동생에게서 휴가를 받았으면 자기를 찾아오기 이전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오라는 연락을 주고받았던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연락을 받던 중 볼프강이 그녀의 옆에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들어두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다.
“어떤 계획이라도 상관없어. 네 동생도 너와 함께라면, 뭘 하든 즐겁게 그 순간들을 즐길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순간들을 꼭 기억해둬. 잊지 말고.”
지금의 기억들을 잊지 말라는 그의 부탁. 의연한 미소를 지으며 했던 말이었지만, 그가 어떤 의미로 자신에게 그러한 부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던 파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의 신뢰가 가는 끄덕임에 볼프강이 안심한다는 뜻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우리들의 휴가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가이드는 지금처럼 계속 될 거야. 잘 따라올 수 있겠지? 파이.”
지금의 일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파이였지만,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던 파이는 이미 잡고 있었던 손을 맞물려 잡으며 놓지 않겠다는 신호를 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에요. 볼프. 남은 휴가 기간까지, 가이드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접수 받았어. 피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파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볼프강의 이야기에, 물론이라는 대답을 남기며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파이였다. 두 시선이 교차하자 이내 미소가 오갔다.
가이드와 파트너. 두 사람의 휴가는, 아직까지도 이어질 전망이다.
....... 결국 일정이 꼬여 막바지에 이렇게 올리고 말았네요 ㅠ
원래였다면 저번 주말에 올릴 계획이었건만, 갑작스레 잡힌 주말 일정들을 보낸 이후 평일에는 출근....... 겨우 이렇게나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셨을지는 잘 모르겠는 볼프강&파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짧게 마무리 지었지만,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저런 내용을 더 넣어봤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글이 되버렸군요.
여기까지 봐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다른 글로도 찾아올 수 있다면, 그 때 다시금 찾아뵙겠습니다. : )
이번 편의 키워드는 #부산 , #해운대 입니다.
{{ GetLengthByReCommentTextareaValue }}/200
댓글 {{ GetReCommentTotalRowCou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