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만우절 스토리 이후의, 후일담 같은 느낌의 주저리
※ 기본적으로 개그물 지향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그림일기 왕성 안에 전지전능한 여왕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여왕님은 그 누구보다도 빛이 났고 뭐든지 할 수 있었고 거기다 강하기까지 했습니다.
우아하고 기품 있고 짱 센 프로롬 여왕님 만만세로다!
뭐, 이런 얼토당토치도 않는 설정놀음이 가능하기나 하냐고요? 초등학생의 상상력은 그런 거라고 치죠! 그래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간에, 전지전능한 그 여왕님은 너무도 완벽했기에 도리어 삶이 시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시시해서 죽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아있기는 하니까 살아가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꼭 살아야 하는지 의문인 그런 상태 말이에요.
이거 참, 너무 완벽해도 문제라니까요! 독이에요, 독!
그렇게 무료한 시간만을 막연히 흘러 보내던 어느 날, 여왕님은 한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왕님이 있는 성 바로 밑에 있는 마을에 신출귀몰한 괴도가 한 명 나타났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괴도는 듣자하니 기이했습니다. 도둑이라고 하면 보통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훔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그 괴도는 오히려 나쁜 소문을 가진 부잣집들만 노려서 물건을 훔치고서 그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다닌다는 겁니다.
이 소문을 들은 여왕님은 갑자기 그 괴도에게 흥미가 생겼습니다. 왜냐 하면, 여왕님이 들은 소문 속의 괴도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그야 말로 무적의 괴도였습니다. 그리고 여왕님 또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짱 센 여왕님이었습니다.
강자와 강자가 서로 맞붙게 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까요? 여왕님은 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괴도가 본인의 왕성으로 들어오기만을 계속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괴도가 왕성으로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보를 마을 곳곳에 붙여놓을 정도였습니다. 여왕님은 사실 왕성 밖으로 나가 직접 괴도를 찾고 싶었지만 여왕님은 왕성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왕성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대신 짱 센 여왕님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설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언제 올지 모르는 상대를 기다리는 것은 무척이나 지루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왕님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여왕님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나와 대등하게 맞붙을 수 있는 적수(敵手)였구나. 나 혼자만 짱 센 세계에서는 마음이 편하기는 하지만, 그 편안함이 지속되면 무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내심 소문의 그 괴도를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만약 소문의 그 괴도가 강하기는 하였다만 결국 자신에게 간단하게 제압이 된다면? 그러면 또 그 지루할 뿐인 삶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것은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져주면서 상대방과 줄을 타는 것도 싫었습니다. 여왕님은 언제나 압도적으로 상대를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봐주는 건 맞지만 상대는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힘 조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여왕님은 이제까지 그런 힘 조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여왕님은 언제나 전력으로 맞붙었고, 그래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습니다.
여왕님이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던 와중, 어느 달빛이 무척이나 밝은 밤에 괴도는 드디어 여왕님을 찾아왔습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괴도가 여왕님에게 건넨 첫인사였습니다.
괴도는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왕님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괴도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여왕님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괴도는 당황한 여왕님에게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너, 너는 나. 여왕과 괴도.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사실 ‘한 명’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같은 것이라고.
괴도의 설명에 여왕님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본체’는 여왕님을 가리키며 흑역사라고 했으면서, 초등학생 이후로 또 하나의 흑역사 같은 것을 만들다니! 그리고 이쪽이 어째서인지 그림체 같은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건 무엇인지!
아무튼 무료하던 여왕님의 삶에서, 새로운 설정으로 침입한 그 도둑 덕택에 여왕님의 삶은 조금 더 즐거웠을지도 모릅니다.
동화 끝! 아무튼 끝!
……제발 여기서 끝내게 좀 해줘!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시말서를 써야 하는 거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피 씨?”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래요, 아무 일이 없기는 했죠. 현실에 한정 지어서는 말이죠.”
그것은 전부 그림일기 속에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슬비의 덧붙임에 하피는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했다.
“그림일기 속에 있었던 일은……. 큼큼, 그건 보석을 누가 만지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써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다만, 왜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보석을 굳이 훔치러 들어갔다는 점과 그 보석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효력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주셔야 해요.”
슬비의 사유는 나름 설득이 있었다. 허나 하피는 이 일만을 지독히도 피하고 싶었다. 귀찮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귀찮다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피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 시말서를 쓰기도 전에 가벼운 준비 운동마냥 눈앞에서 자신이 시말서를 다 쓸때까지 감시할 목적인 슬비에게 푸념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훔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나름 예전의 괴도 일을 했다 보니 보석에 대한 감별 정도는 할 수 있어서……. 소원을 이루어지는 보석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느 누구라도 흥미가 동할 법도 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엄중한 보안 시설 안에 있는 보석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보통은 하지 않아요, 선배님…….”
“후배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시라는 거군요.”
“그것이 명시된 규칙이니까요.”
그래도 그나마 감시하는 사람이 슬비라서 다행이었다. 만약에 은하였다면……. 아마 그 그림일기 속에서 벌어졌던 일을 가지고 밑바닥까지 다 긁어모으듯이 캐물었을 것이다. 슬비도 대충 그림일기 속에서 만난, 왜인지 모르게 반갈죽 머리를 하고 나온 ‘어떤 인물’이 누구에게서 파생되었는지 아는 것 같지만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은하보다는 훨씬 나았다.
“흑역사라는 건 본래 하나씩 가지고 있는 법이라니까요. 가끔씩 의도치 않게 나에게 찾아온다고나 할까…….”
은근 둘러서 말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묻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하피의 암묵적인 부탁이었다. 슬비는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그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를 해주었다.
그랬다. 남의 흑역사든 나의 흑역사든 이렇게 은근슬쩍 묻히듯 다시 묻는 게 가장 나은 법이었다.
물론 순수한 아이들은 그런 부분보다는 단순하게 멋졌다는 느낌만으로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말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시말서를 다 쓰고 - 슬비가 몇 번이고 퇴고를 시켰는지 모른다 - 겨우 탈출하게 된 하피는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림일기에 그렸던 그 그림을 그림체까지 똑같이 따라 해서 그린 미스틸의 그림을 보고 경악했다. 그 반갈죽 머리까지 똑같이 따라한 것까지 보고서 말이다!
……왜 잘 넘어갔다 싶었는데 다시 또 이런 시련이.
하피는 이 그림을 당장에라도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지만, 어떠냐면서 자신에게 그저 순수하게 감상평을 물어오는 미스틸의 저 천진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림을 찢거나 하는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미스틸테인 군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간신히 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의 구석 부분만을 있는 힘을 다해 꾸길 뿐이었다. 이런 하피의 말에 미스틸은 기뻐했지만 눈치가 빠른……그러니까 마침 그 근처에 있었던 소마와 루나는 하피의 기분이 상당히 엉망진창인 것을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눈치 채고, 아주 천연덕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는 하피의 후배 한 명도 하필이면 마침(!!) 그 근처에 있었다.
“와, 정말로 똑같이 생겼네요, 선배님이랑.”
“……화낼 거예요, 후배님?”
“이게 다 선배님이 그 출입금지 구역만 들어가지 않았어도 생기지 않았을 일이잖아요.”
“변명 같겠지만! 제가 들어갔을 때는 3월 31일이었어요?! 보석을 만지는 순간 4월 1일로 된 것 뿐이에요!”
“그것도 의도한 거라고 생각이 드는 데 말이지요.”
“저 진짜 화낼 거라고요, 후배님……?”
“와, 정말로 무섭네요, 선배님.”
은하 씨, 연기가 너무 어색해요. 국어책 읽기톤이야.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악의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저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 하피만 고통 받을 뿐인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얼른 자리를 비키려고 하는데 미스틸이 하피를 불러 세웠다.
“그런데 하피 씨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미스틸 군?”
“여왕님 혼자서 외롭지 않을까요?”
윽! 하필이면 그 호칭으로 부르다니! 하피는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은하가 소리를 죽이며 웃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은하를 하피가 있는 힘을 다해 째려보았지만 은하는 모르는 척 휘파람만 불어댈 뿐이었다.
외로워? 그런 거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시절이 하피는 말이다! 그저 짱 센 여왕님이 된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려본 것이 전부였기에, 그 여왕님 밑에 딸려 있는 하인들이나 귀족 출신의 소꿉친구 같은 걸 당연히 상상했을 리가.
하피는 아무튼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미스틸에게 스케치북을 돌려주면서, 미소는 유지하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럼 미스틸 군이 만들어주실래요? 여왕님……의 친구를 말이에요.”
“정말요? 진짜요?”
“네. 그럼 여왕님……도 마음에 들으실 거예요.”
“좋아요! 그럼 하피 씨를 예쁘게 그려드릴게요!”
잠깐만……누구를 그린다고? 하피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미스틸의 논지는 이랬다.
“여왕님은 하피 씨에게 나온 거잖아요. 그러니 여왕님께 가장 어울릴만한 친구는 하피 씨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정말이지 참……. 마음씨가 곱고 아이디어를 착안하는 지점도 참 참신하기는 한데…….
하피는 지금 그냥 이 자리를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하피를 최선을 다해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은하가 덧붙였다.
“미스틸, 그러면 선배님의 괴도 시절로 그리는 건 어떨까? 여왕과 클로저, 보다는 여왕과 괴도라는 그림이 더 살아날 거 같은데.”
흑역사 더하기 흑역사는……사회적인 죽음뿐이다.
결론적으로 미스틸은 확실히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게 맞았다. 괴도 시절의 하피를 미스틸은 아주 세련되게 잘 그려냈다. 미스틸은 자신의 역작을 다른 클로저들에게도 돌려가며 보여주었다. 클로저들은 미스틸의 그림 실력을 칭찬하는 한편, 어째선지 하피를 바라보며 은은한 시선 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그 은은한 시선들이 겹칠 때마다 하피는 자신의 마음이 점점 낡아가는 것을 느꼈다.
하피는 언젠가 자신의 흑역사가 둘이나 그려진 저 물건을 훔치고, 남 몰래 태워버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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